[기도 2월]
발행일1962-01-28 [제312호, 2면]
일반의향>
일하는 중에도 기구를
『신자들이 당하는 생활고(苦) 가운데 많은 때를 기도로 보내기를』
기도는 보편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종교를 기도라고 정의할 수 있을만큼 그것은 보편적이다.
의식과 신조와 마음씨는 다를지라도 약한 피조물인 인간은 근본적으로 신성앞에 자기를 낮추고 그의 최고 통치권을 인정해야하고 그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곤궁에 있고 어려울 때 또한 일상생활 가운데 그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현세상에서 사람들은 특히 소위 문화인 가운데 기도하기를 멀리하는 자를 많이 볼 수 있다.
우리 신자들이 원시 백성보다 기도에 뒤떨어져 있음을 본다.
전 기차와 버스를 탄다. 천주를 찾을 여가가 없고 고요한 때가 없다 일을 마치고 밤에 집에 돌아오면 피곤해서 침상에 들어가기가 바쁘다. 직장에서 천주의 의의를 잊어버린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기도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이 고란은 다만 외부에서 오는 것 뿐만이 아니다. 신이 없다고 하는 공격과 반박이다. 공산주의 「맑스」 무신론주의 지배하에 있는 나라에서는 기도가 완전이 부정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려서는 아니된다. 우리 자신의 기술적 문명을 자랑하는 자연주의도 역시 무섭다. 그들은 종교를 인증한다. 그러나 입으로 혹 조소적 미소로 그들은 기도는 이전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한다. 신은 이 세상에 임이 계시지 아니한다. 사람이 자연의 힘을 이용할 때 신을 덜 생각한다. 그들은 천주가 멀리 있고 무능한 존재처럼 간주한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면을 서서히 변화시키는 인간계획의 위대성을 감탄함은 옳다. 그러나 인간의 이 모든 노력은 아직도 천주의 선물이다.
만일 세계전쟁이 온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다시 기도하기 위하여 무릎을 꿇것이다. 이것은 불안을 억제하기 위함이라기 보담 그때 윈간은 자기 자신이 너무 적다고 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에 직면한 나를 아무도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현대인을 위해서도 아직 필요하다.
오랜세기동안 물질적 지적 과학적 진보를 보았고 윤리적 양심의 순화(純化)를 보았지만 사람은 <바오로> 종도가 「로마서」 제7장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약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다.
기도는 아이들처럼 배운 경문을 반복하는 것도 아니다. 기차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오피스에서도 노동중에도
만일 우리의 조과가 우리가 정한 그만큼 길게 할 수 없을 때에는 천주께 한마디로 넉넉하다. 여기 기도의 사도직이 아침 봉헌이라는 것으로 그 가치를 증명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하루를 착하신 천주께 바친다. 그리스도의 회생에 우리 자신을 일치시킨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아침봉헌이 기쁨으로 다시 사라날 것이다. 때로는 매우 바쁜 때라도 잠시 성당에 들어가는 시간을 발견할 수 있다.
주여 기도하는 법을 기도하기 좋아하는 법을 가르쳐 주소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당신 신비체의 확장이 이 지상에 약속된 가장 큰 사업이라는 것을 알어 듣는 은혜를 주소서. 당신과 함께 기쁨 속에서도 일하게 해주소서. 당신 지상대리이신 교황의 모든 의향과 제대에서 계속적으로 당신께 바치는 모든 이의 의향을 위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의 봉헌을 받아주소서.
전교지방>
政治(정치) “善(선)”이 이룩되길
『정의와 공정을 위한 원의에서 행동된 신생국가의 통치자들이 그들의 백성의 선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도록』
<쁠라또>의 『Aecibiade』 대화(對話)에 <소그라때스>가 아무라도 진실과 덕행과 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좋은 정치가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는 것을 진술한다. 이것은 한말로 정치가의 사명이 어렵다는 것을 요약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기도를 위해 정해진 의향의 중대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공동질서를 위하여 모든 이의 번영과 종교적 의무 이행을 쉽게 해주는 것은 정치가들로 하여금 공동선 위에 취해진 태도에 달려있다. 사실 공동선의 관념은 기독교 사회적 교훈의 중심이 된다.
의로운 것이 되기 위하여 이 관념을 구체적인 환경에 실천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공평이란 묵은 나라를 다스리는 자나 젊은 나나를 다스리는 자를 위해서나 쉬운 것이 아니다. 만일 후자의 경우에 「스캔달」(不正)이나 착취나 불의가 접종한다면 대중의 비운은 더욱 크다. 우리는 이것을 단죄하기 전에 그 배후관계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장관 우두머리들의 봉급은 국회의원이나 하급관리가 생각도 못할만큼 법외적이다. 국가새출에서 또는 해외로부터 주어진 원조에서 착취한 재산 어떤 자리를 위하여 받은 재산 -그것은 어떤 때 짧은 기간에 거대한 재산이 될 수 있다-은 보통 백성이 실업과 만일 아사(餓死)가 아니면 영양부족으로 사는 동안 정치인들의 호주머니 속에 흘려간다. 개인이나 혹 정당의 간부가 한밤중에 세력을 잡는 수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이 세력이 거의 절대적이다. 이들은 모든 임에 있어 공동선을 찾는데서 멀리서 있다. 불의의 이 기만(欺瞞)과 번식을 보고 대중의 분노가 탄다. 그것은 그들의 후진성에서 오는 기아와 비운과 실직과 무직과 질병과 접전하는 분노이다. 그것은 악한 목자가 민주주의를 파괴할 때 타는 분노이다. 그러면 <맑스>의 복음을 듣는 자들을 발견하게 되고 공산주의 나라를 만든다고 하는 광명을 준다. 악한 일의 결과는 그 몇배의 화를 받는 법읻. 모래위에 세워진 집은 바람에 저항할 수 없다. 그럴지라도 공동선에 대한 교리는 나라가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같은 걱정 특히 가난한 자들을 위한 걱정을 해야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네오> 13세 교황의 말씀대로 나라는 노동자의 섭리가 되어야 한다. 영적 지도자가 지금보다 더 많이 나와서 가난한 자의 변호자가 될 필요가 있다. 신자들은 학리(學理)와 실천으로 약한 자의 권리가 보호되고 도움을 받고 조직적이 되도록 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 나라의 지도자들은 일치해서 또한 동시에 지혜롭고 양심적이 되어 가난한 자와 대중 사이에 어떻게 하면 생활의 피ㅛ준을 잡을 수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기 백성을 파멸적인 큰 위험 속에 몰아 넣게될 것이다. 우리는 젊은 나라의 권위가 강하고 효과적이라야 한다고 혼연히 동가마는 바이다. 그러므로 위험은 전체주의에서 오는 것이다. 이 주의는 봉사하기 보담 종사 받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주인은 봉사하는 자 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권위는 남을 위하여 공동선을 위하여 실천될 것이다. 권력은 오로지 진리와 정의와 사랑에서 실천되어야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이란 쉬운 것이 아니다. 또한 좋은 고문격이 되는 충고자는 부족하다. 권력은 금전처럼 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이들이 그 임무의 높고도 신성한 것을 깨닫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활을 좋아할 수 있도록 기구해 주어야 한다. 특히 젊은 나라를 다스리기가 어렵다. 천주로부터 이 권리를 받은 자는 믿는 자들의 기도의 도움을 받아야 그들의 초인간적 직무를 많은 과실없이 이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