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그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입시키는 임무는 세계 어느나라 어느 민족에나 꼭 같은 것이다. 한 나라 한 민족이 어떤 특전을 가질 수는 없다. 본래 신이 인간을 조성하실 때 등급을 지어서 창조하시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10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한 민족 혹은 어떤 색갈을 가진 인종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誡命)이 한 민족에 제한된 것이 아니었다. 민족 차별이란 가톨릭의 가르침과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다. 만일 가톨릭이란 이름을 가지면서 민족차별을 호응하면 그것은 현대의 가짜 선지자요 오늘날의 겉꾸미는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가톨릭교회는 과거 많은 불편과 죽음까지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사명을 어느 나라에서든지 이행해 왔다. 「아프리카」 역시 여기서 제외되질 않았다. 물론 각 민족이 그 특이한 풍속과 생활양식 그리고 그 표현양식-문화-이 반드시 가톨릭의 절대가치와 항상 일치한다고 하기 어렵다. 이것은 교회의 2천년간의 경험이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자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첫 시기는 거의다 순교라는 두 글짜로 일관되어 있다. 그 이유는 가톨릭의 종교가치가 한민족의 문화가치와 접촉될 때 거기는 반드시 마찰이 생기는 법이다. 반대되는 어떤 문화면이 있다면 그것은 혹은 무지에서 혹은 불건전한 외래사상에서 혹은 외곡에서 한민족을 목적하는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 하는 지도급에서 올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가톨릭과 상반되는 것이라도 가톨릭진리 안에서 동화 선화(同化 善化)되고 향상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재건한다는 것이 「아프리카」의 가톨릭의 목적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파괴하려 오시지 않고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가 「아프리카」를 위대하게 만든 빛나게 한 문화가 있다면 그것을 부정해서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긍정하고 향상시키며 그리스도 안에서 재건하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문화 중에는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를 가족제도에 두고 있다. 이것은 자연법과 계시된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이며 가정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둘러싸고 맺어진 결합은 진실로 「아프리카」 문화의 기반이며 동시에 가톨릭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극도로 이단화한 조상숭배와 오랫동안 깊이 뿌리박힌 귀신 숭배같은 것은 교회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충돌될 「아프리카」의 문화면이다.
현대 가톨릭이 당면하고 있는 난문제는 「아프리카」의 장단의 문화적 특이성 보다도 정치적 국제세력의 「쁘로빠간다」(선전)로 인한 심적 불안상태이다. 오늘날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힘을 다해서 「아프리카」의 정치적 세력을 손아귀에 넣으려고 노력하는 현상이며 동일한 숭배대상을-그리스도- 갖는 그리스찬이 일치되어 있지 않고 분리되어 있는 점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문화적 저해나 정치적 국제세력으로 「아프리카」를 그리스도 안에 재건하는 교회의 사명은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아프리카」의 가톨릭신자 수는 총 인구의 일할 2천만이며 그 주는 영향력이란 이 수적 비율보담도 훨씬 큰 것이다.
또 많은 방인주교, 신부-2천의 신부- 그리고 해마다 속출 증가하는 성소가 교회가 얼마나 큰 관심과 복음 전파에 힘쓰고 있는지 똑똑이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한대륙 한민족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오늘의 「아프리카」 가톨릭의 교세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는 흑인종 백인종 황인종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가톨릭교회 안에는 모든 인간은 하나이며 가톨릭신자는 민족차별을 배척해야 하며 이것을 위해 싸워야 한다.
진정한 형제애를 모든 이에게 고무시켜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이라면 또 우리가 그 신비의 한 지체라면 그 안에서 우리는 사랑으로 일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