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對話(대화) (中)
對話(대화)는 不可能(불가능)한 것
그 姿勢(자세)가 마련되어야 한다
公議會(공의회)에 큰 期待(기대)들
발행일1962-01-28 [제312호, 4면]
(承前)
스트란스키=그리스도교의 분열은 확실히 비그리스도교들로 하여금 믿을바를 매우 어렵게 만들었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슴을 입증하기 위하여 이같은 역사의 쓴 경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은 비극이겠읍니다.
넬손=실은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1910년에 「에딘부르그」의 「국제선교사회의」서부터 근대 「에큐메니칼」 운동을 건개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서로 상이(相異)한 전교방법으로 인한 「스캔달」을 단지 시정하기 위한 것 같았으나 그러나 곧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은 「에딘부르그」의 <브랜트> 주교의 솔직한 판단을 정직하게 받들게 된 것입니다.
즉 모든 교회의 분열은 「스캔달」의 근본적 원인 그 자체이라고 하였읍니다.
「스」=또다른 각도에서 나는 「국제 선교사 평의회」(IMC) 사무국장 <뉴비긴> 주교의 비판을 해석하고 싶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일치를 증진하는데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 비그리스도교인들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하였읍니다. 다만 놀라운 일은 분열된데로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말하였읍니다.
「넬」=나는 많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공의회가 평신자들의 지지(支持)와 이성적(理性的)인 활동을 받음으로써 고무되기를 희망하고 있는줄 믿고 있읍니다. 나 개인의 경험은 YMCA를 통하여 풍부해졌읍니다.
정말 YMCA 안에서의 평신도들의 사업은 얼마나 평신도들이 교직(敎職)의 특권과 책임을 여하한 방법으로 방해함이 없이 그리스도교인의 목적에 효과적인가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스」=교황 <비오> 12세께서 『교회는 평신도이다』라고 하였을 때에 나는 사제를 포함한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이 「프로테스탄트」이다고 할 만큼 충격을 받았으리라고 생각했읍니다. 그같은 성명은 그리스도가 교황과 주교 및 사제에게 준 참다운 권위가 전세기(全世紀)를 통하여 교황이 채택한 동일한 「타이틀」 즉 『천주의 종복(從僕)들의 종복』 하에 그들이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펀주의 종복된 평신도들은 지상에서 교회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때로는 사제의 부족을 보충하는 것으로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평신도 임무의 바로 그것이 또 근대적 사목 실천에 있어서 그 영향이 공의회의 신학위원회 평신도 사도직 이원회 및 일치국을 통하여 취급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회가 무엇을 결정하든 간에 나는 가톨릭신자나 마찬가지로 비가톨릭신자들이 인내할 것을 희망합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 비틀거리지 않게 걸음걸이를 가르치는 것과 같이 힘든 일이며 더욱이 완전히 자란 아이 즉 평신도에게 처음으로 원만한 스텝을 가르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입니다. 게다가 권한이 부여된 평신도의 교사인 주교와 신부들의 대부분은 그들을 인도하는 분야에 있어서 아직도 충분치 못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평신도에 관하여 이야기 하는 시대에 있으며 평신도 시대에 있는 것은 확실히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실지로 전체 교회가 완수되기에 앞서 평신도사도직이 오랜 시일이 걸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공의회는 오로지 평신도의 임무에 관한 인도적(引導的)인 제원칙(諸原則)만을 정할 것입니다. 공의회는 국가와 교구와 본당 등의 각양각색의 환경에 따르는 세밀한 적용(適用)을 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의회령(公議會令)은 오래전에 양심적인 정신적 생활과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활동으로 滲入(삼입)하는 함축성(含蓄性)을 요구하였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침입 과정』(渗入過程)은 만일 _마에 참집(參集)한 교황과 주교들이 이런 모든 가톨릭신자들이 거대한 정신적 묵상(默想)을 시작하기 위한 전체교회의 소집으로서 공의회 소집을 생각한다. 더욱 빨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공의회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 기구는 공의회의 제결정(諸決定)을 체계우고 승인하는 모든 곳의 계몽적인 인도(引導)를 위하고 또 모든 평신도 사제 수도사, 주교들이 신앙과 사랑 안에 이와 같은 제결정을 받아들이고 같은 신앙과 같은 사랑 안에 그들이 살고 그들이 실천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넬」=공의회 이후에 많은 가톨릭 평신도들이 의향이 있고 흥미를 가지고 있는 그들 「프로테스탄트」 형제들과 종교문제에 관하여 대화(對話) 하는데 있어서 충분한 자격 부여와 신뢰를 느끼는 것은 예견(豫見)이 있읍니까?
「스」=공의회는 말과 행동으로서 가톨릭신앙을 증명하는 의무와 특권을 평신도들이 더욱 의식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물론 그 자격(능력)은 여하튼 간에 미국의 평신도는 미국사람 생활방법이 만연(蔓延)되어 애매(曖昧)한 계률(戒律)에 도전(挑戰)해야하며 또 종교는 대화(對話)를 위한 「토픽」이 아니라는 것에 도전(挑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더욱이 어떤 평신도는 자기자신의 지식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자기 신앙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를 두려워하고 있읍니다. 많은 비가톨릭신자들이 가톨릭 평신도들에 의해서 나에게 참조(參照)해 왔읍니다. 이같은 대화(對話)에서 일어난 결과들이 너무나 단순했기 때문에 나는 어찌하여 평범한 가톨릭 신자들이 그들 자신에 관하여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았는가를 관찰하는데 실패했읍니다. 중요한 대화에서 우리들은 몇몇 대_ 자격있는 평신도를 발견했읍니다. 때로는 평신도들이 교회 정치, 사회 및 경제 분야에 있어서 그리스도교적 결과를 논의(論議)하는데 있어서 사제보다 더욱 훌륭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에 얽매여 살면서도 그들의 종교적 (함축성)(含蓄性)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읍니다.
「넬」= 『대화』에 대한 나의 참고는 아마도 그 형식적인 방향에 더욱 많은 강조를 두고 있을겁니다. 물론 나는 우리들이 오늘과 같은 순간에 처해있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화』는 또한 그리스도교 형제들이 공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자리를 같이 해야하는 자연적인 대화라든가 혹은 단순히 맞나고 서로 이야기한다든가 하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는 대단히 많은 경우에 기회가 마련되어야 하며 최소한 이 나라에서는 형식적인 것보다 앞서 진실한 대화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선량한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가톨릭 평신도나 혹은 지방의 신부와이야기하는 동안 참다운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가 자유스럽다는 것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어쩐지 그가 제한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읍니다. 때때로 그러한 인상을 신문이나 혹은 특수한 위치를 의미하는 회칙(回勅)을 읽어서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위치(입장)를 알지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반적인 일로(평범사) 읽고 있읍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