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上(한국사상)의 殉敎者(순교자)
발행일1961-09-24 [제296호, 4면]
■ 序論
한국사상(韓國史上)의 순교자라고 하면 일찌기 임진난 때 일본군에 잡혀 갔던 사람 중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들이 일본장기(長崎=Nagasaki) 교외에서 순교함을 비롯하여 병인년(李氏朝 高宗 3年=1866 丙寅)의 순교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오늘 우리들이 그들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 볼 때는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바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한국인 전체가 이 사실을 한국 가톨릭사상(史上)의 사실로만 돌리기에는 너무 큰 일이었고, 그 정신을 가톨릭정신으로만 돌리기 어려울 만큼 강하고 빛나는 것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근세사상(韓國近世史上)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사상 기념할 정신의 발현이었다고 하겠다.
■ 1. 殉敎史實의 理解
한국사를 크게 기념하고 우리들이 오늘에 그 정신을 간직해야 할 순교사실의 이해야 말로 한국근세사의 인식에 있어선, 직접 한국 가톨릭사(史)의 인식에 있어 중요한 일거리 측에서는 일부 조사-정리-소개로 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또 한국사학의 자리에서 학적으로는 그리 따져지지 못한채 남아있는 형편이다. 사실의 얘기에 앞서 잠간 그 이해방법과 문헌에 대해 한 두 가지를 말하고 넘어가겠다.
물론 피로 물들인 한국 가톨릭사는 관계자로의 총집대성(總集大成)이라고 할 <다례>의 「한국성교회사」에서 여러 가지 귀중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으며, 일반 독서자(讀書者)들에게는 우리말 번역이 해방 전에도 한 번 이루어졌고, 해방 후 근자 다시 번역 중에 있어 그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국정신사의 자리에서 다시 사회사적(社會史的)인 배경-기반에서 따져야 할 것과, 가톨릭 사상의 수용(受容)과 그 신앙화 다시 성서가 지시하는 전도의 정신, 끝까지 지녀야 할 「신앙」의 정신이 승화(昇華)되어 순교로 나타남을 다시 생각할 때는 고구(考究)할 바가 한둘에 멈추지 않는다. 더욱이 신앙의 사실을 제대로 전하기 어려웠던 한국에 있어서는 얼마의 박해사로의 반가톨릭적인 기록에서 역리적(逆理的)으로 추리하는 직접적이 아닌 방법에 의하여야 하는 난점이 있다.
■ 2. 早朝 殉敎者
비록 해외 「일본」에서이지만 1622년(光海君 14年·壬戌)-1627年(仁祖 5年·丁卯) 사이에 순교한 복자(福者)들이 있다. <다례>도 초기의 사실을 1597년 「미란」에서 간행한 <고메즈>의 「일본년차서한(日本年次書翰)-1593-4년」, 1598년 「로오마」 간행의 <흐로이스>의 「일본년차서한-1595년」 또 「로오마」 1599년 간행의 「일본년차서한-1595년」이나, <샬르보아>사의 「일본성교사」, <빠레스>의 「일본사」 등을 이용하여 얼마의 사실을 대략 소개는 하고 있으나, 일본 가톨릭사의 연구가 발전된 오늘에는 잘 발달된 수준의 것을 수용하여야 할 것이며, 우선 일본인 <유곡무부>(_谷武夫)의 「일본성인과복자」-축일별 복자순교자 일람표(日本 上智大學_ 「가톨릭大_典」 ①836-41 參照-1940年 日本東京刊)에서 한국인 순교자가 열석(列席)됨을 보겠다. 이 이외에도 일본 시구관계 연구의 구성이었던 <행전성우>(幸田成友)의 단편적인 조사-연구에서도 한국인의 순교사실을 밝힐 수 있다. (이것은 필자가 정리해서 『신천지』 1952년에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경력을 아직까지는 좀 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저 성명(주로 領洗名과 日本式 이름)과 그들의 소속 교파와 「조선인」이라고 국적이 밝혀진데서 역사적인 귀중한 자료로 취급할 뿐이다. 힘드는 일이지만 남겨진 문자가 희소한 한국 초기말 가톨릭사의 개척에 따라 사실을 이해하는데 문자가 한자대로 더 첨가되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 3. 韓國 殉敎史의 「3時代」
1791년(正祖 15年·辛亥), 전라도 진산(全羅道 珍山)에서 폐제사건(廢祭事件)으로 윤지충, 권상연(尹持忠, 權尙然)의 순교에서 시작되어 ①1801년(純祖元年·辛酉)의 대규모의 배교정책(背敎策)에 따라 다수의 남인서학교도(南人 西學敎徒)들이 옥중에서 장사(杖死), 유배(流配), 참형(斬刑)을 받은데서 우리 순교사의 한 시기가 획정된다. 이 순조 신유(純祖·辛酉)박해사건은 신앙의 문제보다도 장헌(莊獻=後에 諡號를 思悼라 함) 세자(世子)를 중심으로 한 정쟁에서 세자를 살해할 노론(老論) 중심의 일파(僻派)와 그것을 반대한 남인중심의 청파(_派)의 싸움에서 벌어진 것으로 벽파에서는 남인들이 신교의 중심이 된데서 신앙문제를 들고 나왔던 것이다. 이 서학 신봉(西學 信奉) 문제는 사도세자의 아드님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재위 중에는 이리저리 억제가 되었는데 정조(正祖)가 1800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비호를 받는 남인 신도들은 해가 바뀌는 1801년 음정월 초부터 잡히어 악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갈등에서 왔으므로 노론벽파의 반대되는 1벽이 정치일선에서 몰락되었고, 중심되는 남인신도들은 박해 중에서도 가톨릭 신봉의 명맥을 이어가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었다.
②1829년(憲宗 5年·己亥)의 박해는 신유(辛酉) 이후 조선교회 재건을 위하여 가진 신고(辛苦)를 다 겪으면서 북경교당(北京敎堂)과 연락하여 불국신부를 직접 근접하하여 아직 미숙한 여러 가지 의식을 제대로 배우며 본격적인 신앙의 길을 개척하여 오던 중, 재연된 바다. 이 때는 신유(辛酉)와는 달리 직접 서학교도에게 불안을 느낀 관료들의 탄압이요, 또 신유까지의 자연발생적인 신봉에서 좀 더 확고하게 본연의 신앙생활을 하던 불국(佛國) 선교사와 함께 우리 교우들이 극형에 굽히지 않고 순교한 데서 지금 그 고귀한 행동이 우리 역 상에 빛을 내고 있다.
③1866년(高宗 3年·丙寅)이어 고종 3년(高宗 3年)에 있은 이른바 대원군(大院君)의 박해라고 하는 제3차의 박해는 광범히 수많은 교도를 처형하고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운 시기의 사건으로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었다. 이때는 북과 남에서 신세력(實은 資本主義 列强의 侵略的인 힘)을 어떻게 막아내야 할 것이냐 하던 대원군이 교도들을 통하여 불국선교사의 힘을 빌려, 남하하려던 노국(露國)의 교섭에 대항하려 했었으나 그의 급한 성격에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는데서 되집어 교도들을 처형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도 신앙 자체를 본질적으로 문제를 삼아서 탄압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근세사상에 있어 왜? 가톨릭을 금압하였느냐 할 때 신앙문제가 본질적으로 논의되어 가지고 뚜렷한 어떤 지표를 갖고 교우를 처형하였다고 말하기에는 아직까지 불분명한 조건이 많다. 3차에 걸친 대박해에 있어서도 왜? 금압한다는 「토사문」(討邪文), 「윤음」(綸音)이 발표되었으나, 내용인즉 순 유교윤리에 배치되는데서, 국가사회를 문란케 한다는데서, 그릇된 생각이라 해서 「천주의 교」를 버리라는 것이다. 즉 배교(背敎)하면 방환(放還)되어 그대로 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항거한 교우들이 청정(淸淨)한 생을 천국에 살릴 수 있었던데서 우리 순교사는 수(繡)놓은 것이었다.
이제 세 시기를 들어서 얘기하였으나 사실은 1785년(正祖 9年·乙巳) 형조(刑曺)에 예배중(禮拜中)인 교도들을 잡아들인데서부터, 1887년(高宗 24年·丁亥) 9월(조선천주교예배규정서)가 이루어질 때까지 가톨릭의 신앙은 수난의 길이 그대로 계속되었었다. 이 기간의 한국 가톨릭사는 곧 순교사로써 형성된다.
■ 4. 한 사람의 殉敎史
찬란한 한국순교사가 한국사학의 전문학도의 손으로 이루어질 날을 기다리며, 여러 복자 중에서 신앙뿐 아니라 한국사의 전면에서 볼 때도 주시해야 할 순교자 한 사람을 보기로 한다.
이미 「파리외방전교회」에서 내놓은 『한국성교회사』라든지 『한국순교복자전』 등으로 알려진 바이며, 근자에는 김구정(金九鼎) 선생의 『피묻은 쌍백합』 『성웅 김대건전』 등으로 순교사업이 밝혀가고 있으나, 또 한 사람의 순교사가 밝혀지기를 바란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鍾)의 아드님 정하상(丁夏祥)에 대해서는 순교복자전에 알려진 바이지만, 좀 더 알고싶은 점이 많은 이다. 그의 아버지 정약종은 이복(異腹) 맏형님 정약현(丁若鉉)에서부터 동복형(同腹兄) 정약전(丁若銓)과 아우 정약용(丁若용)과 함께 가톨릭을 신봉했고, 그 인척간(姻戚間)에 거이도 가톨릭과 관계가 있었다. 백서(帛書)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은 정약현의 사위로 이승훈(李承薰)과는 남매간이었으며, 한국초대교회의 지도자이었던 이벽(李벽)이나 당시 동색(同色)의 혈연관계에서 학(學)과 신앙이 비저질 때에 가톨릭을 이해하고 신봉하였다. 신앙에 있어서도 옥사하였을 뿐 아니라 교리의 이해면에 있어서도 정약종은 따로 『주교요지』를 남기고 있으니 이것은 동명의 중간간행서와는 편성함이 다른데서 18세기 후반기 한국사회가 이해한 가톨릭 교리 이해의 1단면을 단적으로 지시하는 바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태어난 정하상은 일곱살 때 아버지와 형 철상(哲祥)의 순교함을 당하고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일가(一家) 집에 부쳐있었으나, 하인들까지의 냉대로 견디다 못하여 따로 나와서 살며 자기들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키우게 되었다 한다. 복자전에서는 정약종댁에 기류(寄留)하였다 하나 확실히 다시 따져 보아야 할 일이다. 그 때 약종의 형님 약전은 전남 흑산도(全南 黑山島)로, 아우 약용은 전남강진(全南 康津)으로 이배(移配)되었을 때니 어느 집안이고 안 사람만이 남아있을 뿐이요, 박해선풍에 불안한 때이었으니, 인심을 가리어보기 어려웠었다.
그러나 가법(家法)과 가학(家學)의 전통을 지닌 정씨 일문의 분위기와 신앙을 잘 조화시키는 그 어머니의 힘이 컸었다.
정하상은 1801년 박해 후의 주인 없는 한국교회를 위하여 힘쓰게 되었으니, 20에 서울로 와서 어떤 역관(譯官)의 하인으로 북경가는 길을 트고, 북경에 가서 성세·견진·성례(聖洗, 堅振, 聖禮)를 받고 주교와 만나 우리 교회에 신부를 파견토록 교섭을 하였으나, 처음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계속해서 북경으로 왕래하며, 신부를 초청하기에 힘썼다. 유명한 소(蘇)주교를 맞이하러 갔으나 소주교는 도중에서 회천(回天)하였고, 1833년에 중국인 유(劉) 신부를 맞이하기에 성공하였고 정하상은 직접 압록강 안까지 영접하러 갔고, 국내로 잠입하는데 선도하였다. 이어 불국의 <모방> 신부와 <쏴스땅> 신부, <엥베르> 주교를 인도하기에 성공하였다.
그는 신심(身心), 덕행, 강직한 성격, 재질, 생각하는 것 등이 뛰어나 교우들이 추앙하게 되었었고, 당시 교회의 모든 일을 지도, 처리하게 되었었다. 안으로 주인 없는 우리 교회를 지도하며, 밖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를 영접키 위한 노력은 절대하였다. 비밀의 한국교회를 이끌고 나가는 정하상을 본 <앵베르> 주교는 그를 사제(司祭)로 서품(敍品)키 위하여 「라띤」어와 신학을 가르키었다. 이것은 정하상의 나이도 있었고 일할 손이 모자라는 한국교회에서 여유있게 외국 신학교에까지 파견하여 본격적인 교육을 시킬 겨를이 없었었고 또 그의 인품과 지식이 능히 국내에서의 공부만으로라도 감당할 수 있다는데 국내 교육만으로써 직책을 맡게 할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써 보면, 한국교회가 지닌 한 사람의 지도적인 위인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 우리 교육·문화사상 그가 차지하는 의의도 크다. 아마 「라띤」이나 「프랑스」 말을 본격적으로 교육받은 제일 첫례가 정하상이 아닌가 한다.
그는 바쁜 중에서도 이교도 사이에서 고생하는 어머님과 누님과 함께 천주의 구원의 길을 닦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약종의 一가는 계속 신앙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러자 1839년(憲宗 5年·己亥)의 박해가 있자, 정하상은 박해 속의 교우들을 바라만 볼 수 없어 호교론(護敎論)으로서의 일문(一文)을 쓰게 되었다. 그것을 우리들은 「상재상서」(上宰相書)-이것은 얼마 전에 「가톨릭청년」지에 연재되었음-라고 한다. 가톨릭 관계문헌이라고 대부분 반대파의 것으로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와 함께 귀한 것의 하나이다.
7월11일 포교(捕校)를 보내서 정하상과 그 어머니 누이를 함께 포박하였다. 정하상은 의금부(義禁府)에서 신문을 받을 때 그 때 우상(右相) 이지연(李止淵)에게 보내는 호교론을 제시하였다.
정하상은 나라와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기 위하여 명확한 대답을 하였다. 그 때 문초의 일절을 보면
『네가 조선의 풍속을 저바리고 외국교를 행하며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 교를 전파한다니 그것이 참말이냐?』
『우리는…… 다른 나라에서 들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참된 종교인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이 옳은 일이겠읍니까? 천주교는 누구를 물론하고 신봉하여야 할 종교입니다』
『네가 외국교를 칭찬한다! 그러면 국왕과 재상들이 그것을 금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냐?』
『그 말씀에 대답할 말이 없으니 내게는 죽음이 남았을 뿐입니다.』
라고 하며 정하상은 끝내 굽히지 않았다.
그리하여 1839년 9월22일 저녁 네시쯤 서소문(西小門) 밖 현장으로 끌려나갔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를 띠우고 있었으며…… 벌써 이 세상 사물에는 조금도 구애되지 않은 것 같았다.
순교하는 때의 나이 45이었으니, 일곱살 때부터 38년간 고난의 세파를 이겨낸 정하상은 한평생을 한국교회의 재건에 이바지하였으니, 평생을 희생과 노력과 여행으로 교회를 이끌어 줄 목자를 구하기에 힘썼고, 그들을 안내하여 교우들의 영(靈)과 육신에 이로웁게 모든 것을 바치고, 끝내는 육신의 생을 바쳐 기교(棄敎)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敎)에 순사(殉死)하였다. (다시 닥아오는 9월22일을 바라보며 1961年 9月13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