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西大敎難(신서대교난) 百大十週年(백대십주년) 回顧(회고)
발행일1961-09-24 [제296호, 4면]
한국 천주교는 1784년에 들어와서 그 이듬해 봄에 서울 명례동(明禮洞) <도마> 김(金_禹)씨 집에서 초대 신자 십여 명이 모여 창립을 선언한 그 당년부터 반전과 박해를 같이 하였다.
한국의 천주교 박해의 동기는 다른 나라와 같이 기성종교 대(對) 신종교 사상대 사상에 있은 것은 물론이어니와 다른 나라 박해사(迫害史)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동기 즉 우리나라 정치사(政治史)만이 가졌던 당파의 압력에서 첫 동기를 잡아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물론 유교(儒敎)를 국교로 하고, 천하에 중국(中國) 외에는 종주(宗主)가 될만한 나라가 없다는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주구(主狗) 유생(儒生)들은 공맹의 도(道)라기 보다 주자학(朱子學)이 아니면 어떠한 학문이나 사상은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배척하였고, 종주국 중국의 것이 아니면 모두 오랑캐(夷狄)의 것이라 물리첬던 것이다.
한국에 사색당파(四色黨派)가 생긴 것도 이 주자학(朱子學) 때문이었고 쇄국주의(鎖國主義)로 고립정책(孤立政策)을 쓴 것도 중국에 대한 사대사상 때문이었었다.
사색당파의 압력은 서로 중상모략에만 그치지 않고 자파(自派)를 위하여, 분쟁과 살육을 서슴치 않아 날이 갈수록 이나라 정치에 그 암(癌)이 되었고 민족자멸의 박차가 되었던 것이다.
천주교를 먼저 신봉하고 포교운동에 열렬하였던 투사들은 대개가 남인(南人)의 시파(詩派) 거유(巨儒)들이였기 때문에 그 반대파인 벽파(僻派) 유생들이 반기를 들 것은 번연한 일이었었다.
표면상 배척 이유를 국시(國是) 위반에 두고, 이면작전은 반대파 박멸에 치중하였던 것이다.
천주교 창립 당년에 아직 감히 시파 거물교도들에게는 손을 못대고, 애매한 중인계급(中人階級)의 인물인 김범우씨를 잡아 사학(邪學)의 소굴 주인이라 처단하고, 시파의 거물교도들의 일거일동만을 주시하던차에, 조상께 드리는 제사와 신주를 폐기하게 된 천주교의 처사를 유일한 구실로 삼아 본격적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1791년 겨울에 전라도 진산(珍山) 사는 진사(進士) <바오로> 윤(尹持忠)씨가 모상을 당하여, 신주를 없애고, 상장예절을 유교식으로 결하였다 하여, 당시 정조대왕께 상소를 빗발치듯 하며, 천주교도를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역도라 단정하고, 기어히 윤지충과 그 외사촌 <야고버> 권상연(權尙然)을 전주 남문 밖에서 그해 11월13일에 죽였다. 금년이 그 박해의 1백70주년에 해당된다.
정조대왕은 일시 그들의 야료에 속아, 사형을 재가하셨다가, 즉시 취소하신다는 윤음을 전주로 보냈으나, 사형집행 후에 도착되어 실패하셨다 마는 왕은 무고한 백성을 파생의 희생물을 삼지 않으시려고, 천주교에 대한 유화정책을 쓰셨고, 천주교 두령들과 같은 남인시파의 거두이던 체제공(_제恭)이 23년간 재상으로 있어, 정조대왕 재위시에는 별다른 박해가 없었다.
그래서 1795년 정월에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하게 되어, 선교사 한 사람도 없이 자발적으로 전교한 결과, 4천명이란 신도를 가졌던 한국교회를 6년동안 구사일생으로 돌보와 1만명의 신도를 얻게되었었다.
그러나 원수들은 흉계를 달리하여, 그야말로 대역부도를 감행하면서까지 천주교도를 박멸하였다.
1800년 여름에 그들의 흉계는 왕을 독살하듯 없애고, 열한살 된 순조(純祖)를 왕위에 올려, 대비김씨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도록 꾸몄다.
김대비는 정조대왕과 숙원이 있던 천성이 교활포악한 인물이었었다. 그는 영조(英祖)의 계비(繼妃)로서, 노론(老論)의 거두 김한구(金漢_)의 딸이요 김(金__)의 누이였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참살 사건에 그들 노론파가 연루되었고, 정조 세손(世孫) 시절에 노조왕(老祖王)의 섭정을 반대하였던 혐의로 정조 즉위 초에 그들이 일망타진의 화를 입게되었었다.
정조는 조부왕께 효성이 지극하였던 관계로, 그 계조모인 김대비에게는 털끝하나 상하지 않았고, 그의 부형 두 사람도 사형을 감하여 귀향선고를 하셨던 것이다마는 그 때 노론과 제휴하여 사도세자 사건과 세손섭정 문제에 연루되었던 남인 벽파인물들이 숙원의 주인공 김대비와 결탁하여 이상 두 가지 사건에 옹호파였던 남인시파에 대한 복수를 획책하였던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대왕 인산(장례) 후 1801년 벽두에 김대비는 천주교 박멸책을 쓰기 시작하여 금교령(禁敎令)을 전국에 나리고 토사교문(討邪敎文)을 반포하는 한편 오가작통(五家作統)법을 시행하여 천주교 두령 인물들은 물론이요 경향 각지에서 잡은 신도의 수는 부지기수였었다.
서울에는 의금부와 포도청이 초만원이 되었고, 충청 전라도의 옥들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남인의 거유들이며, 초대교회 지도자급들이었던 권씨(日新, 哲身) 문중과 정씨(丁若鍾, 若銓, 哲身) 문중과 이(李承薰), 이(李存昌), 최(崔必恭), 최(崔必悌) 총회장 최(崔昌賢) 등이 참살되고, 초대교회 여걸(女傑)이던 <골룸바> 강(姜完淑)을 위시하여, 유명한 부녀신도들이 희생되었다. 이들 순교자 속에 색다른 순교자 두 분이 참가하였으니, 그는 사도세자의 서자(庶子)이며, 정조대왕의 서제이던 은언군(恩彦君=후에 哲宗王의 神父)의 부인 <마리아> 송씨(宋)와, 그 자부 <마리아> 신씨(申)가 강완숙의 알선으로 주신부에게 영세한 분들로서, 사약(賜藥)을 받아 순교하고, 은언군도 그 연루자로 강화(江華)에서 사약으로 참살되었다.
주신부는 본국으로 피난길을 떠나 가다가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하여, 그해 음 4월20일에 한강연변 새남터(沙南基)에서 군문효수(軍門효首) 형을 받고 정약용, 약전 형ㅇ제는 사형을 면하고 귀양선고를 받았다.
주신부를 은신시켰던 강완숙의 여종입에서 모든 비밀이 탄로되어 전주 유(柳恒儉) 형제와 그 가족 전부와 45명의 신도가 함께 희생되고 항검의 아우 광검의 고백으로 유명한 백서(帛書)의 주인공 <아렉산델> 황(黃嗣永) 일당이 희생되었었다.
이 교난에 사형을 당한 자와 옥사한 자의 수가 대략 3백명을 헤아리나, 피난 도중과 산간벽촌에서 기갈 질병에 희생된 교도는 몇백을 헤아리고도 남을 것이다.
이 처참한 교난의 160주년을 당하여 우리는 그 교난의 동기와 원인을 볼 때 망국의 활보는 그때부터 걸었고 막다른 길은 민족자멸이었던 것을 통탄해 마지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