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重要議題들 中共加入 안될듯
9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유엔」 총회는 그 어느때보다 큰 시련에 봉착하고 있다. 그 가장 큰 문제는 중공의 유엔 가입문제, 핵실험 문제, 「베르린」 문제 그리고 유엔기구(機構) 자체의 문제인 것이다. 식민지 문제도 크게 논의될 줄 안다.
그런데 이번 총회 개회 벽두에 「베르린」 문제가 의제에 오르지도 않은 것은 의혹을 주고 있지만 「와싱톤」 당국은 공식으로 의제에 상정될 것임을 선언했다. 중공 가입문제는 그중에서 극적인 분규를 보게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공가입건은 거의 10년간 끌어온 것이었다. 소위 지연작전을 미국측이 써왔었다. 그러나 이 작전이 약화되어 갔다. 작년 투표를 보면 42표에서 34표에 22표 기권으로 약화되었던 것이다. 수개월 전까지의 미국 태도를 보면 여전히 같은 수법만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신회원국의 가입에는 먼저 안보(安保)위를 거쳐야 한다. 안보위는 미국, 쏘련, 영국, 프랑스, 자유중국으로 각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여기 중공과 국부의 관계를 유엔서 처리하기에 난처한 것이 있는 것이다. 중공·자유중국할 것 없이 「챠이나」로 이미 가입되었다고 본다면 문제는 없다. 「뉴지랜드」 대표의 제안을 보더라도 「챠이나」의 가입문제라고 하지 않고 대표문제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대표문제인 것이다. 헌데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다. 즉 중공을 승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이유를 붙일 것 없이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공의 유엔대표 파견은 또 일년 연기될 것이 분명하다. 대개 그 전망은 「뉴지랜드」 대표에 의해 21개 제안국으로 99개국 총회에 상정케 될 것이다. 이 제안 직전에 미국은 「항가리」 문제를 들고 나올 것이다. 이것은 6년 묵은 의제이다. 즉 1956년 쏘련이 「항가리」 내전에 간섭하여 군대를 진주시킨 사건이다. 이런 것은 어디까지나 한 작전에 불과하다. 우리는 참으로 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느냐는데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 3次戰說? 關鍵은 核禁談에
지난 3주간의 정세는 3차전을 성숙시킨 느낌을 주었다. 그것은 1차 또는 2차의 그것과 비겨 더욱 중대했었다. 그 요인(要因)의 전부는 오직 「모스코바」의 무제한 독제에 기인된 것이었다. 그들의 부당한 요구에 서방측은 1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숨가뿐 공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1914년의 전쟁 발발이 다같이 가을이었던 만큼 더욱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평화·전쟁의 관건(關鍵)은 핵실험에 달려있다. 3차대전은 곧 핵전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대개 2백회 이상의 핵폭발이 실험되었었다고 본다. 그 중 미국은 160회에서 170회 쏘련은 60번 내지 70번의 폭발실험을 했고 영국이 20회 가량 한 모양이다. 「프랑스」도 1960년 이래 4회의 실험을 했다. 이 핵실험 경쟁을 보면 한편 「제네바」에서 금지방안을 위한 회담을 진행시키면서 그간 쏘련은 TNT 1억「톤」 혹은 「히로시마」 원자탄의 5천배를 넘는 성능의 그것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1958년 10월31일 「제네바」 핵실험 금지회담을 시작하고 여기 미국 영국 쏠녀이 회담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담보다 더 불성실한 것은 없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희망은 이 회담이 정식으로 개최되는 기간 중에는 실험행위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한 점에는 주목할만하다. <케네디>대통령은 수석대표 <아더뮌>씨의 파견과 그의 결심을 성명했는데 만약 협상에 도달할 장래를 거듭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적당한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잘라서 말했다. 유엔 총회와 같은 비중을 가진 것이 곧 이 「제네바」 핵실험 금지회담이라 할까.
■ 유엔과 敎會 精神貧困 克服해야
여기 유엔총회에 보내신 <비오> 12세의 말씀이 상기된다. 『문제는 정신의 빈곤(貧困)이다. 오늘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의미의 가치를 아는 이가 드물다. 참된 완전한 그리스도교인이 너무나 없다. 세계평화에 작용하는 이 정신성에 확신을 가지라. 이 확신은 교회의 사명이며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있는바 되는 것이다. 참 평화를 얻으려 할진대 국가들의 정신적 빈혈증(貧血症)을 극복할 것이며 각자가 천주와 인간 앞에 다할 책임을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질서를 다시 회복할 때 오직 평화는 보장될 것이다』
이 말씀은 유엔기구를 한갖 정치도구로 기계화하지 말 것을 경고한 것이다. 평화는 각자가 평화에의 신념을 먼저 장만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 천주와 인간 앞에 평화스리 살 수 있는 선성한 권리와 의무를 배워야 한다. 이런 것을 누가 가르칠 수 있겠는가? 현세(現世)적 질서를 보건대 그것은 무책임과 혼란을 조작하고만 있다. 인간을 참으로 행복되게 할 원리, 풍습, 신조 그 아무것도 새로 창조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인류를 「콘트롤」할 수 있는 길 그 길만이 평화를 보장해줄 것인데 만일 「유엔」 기구가 단지 토론의 장소가 아니요 평화를 보장할 성의로서 인류문제를 해결하려 든다면 성실의 원칙을 수직해야 할 것이다. 「유엔」의 위기는 실로 여기 달려있는 것이다.
「유엔」에 대한 가톨릭의 태도를 한말로 표시하면 첫째 그 헌장정신으로 돌아갈 것과 둘째 진정한 평화를 전쟁처럼 조작되는 것이 아니요 각기 천주와 인간에 대한 책임을 다함으로 보장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