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19) 흰 화강암의 수도원 ①
발행일1962-02-04 [제313호, 4면]
<샤르르 드 후꼬오>는 전나무와 참나무숲을 지나서 걸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몹씨 불어오고 있었다.
1890년 1월16일의 일이다. 별안간 바로ㄴ 마주 보이는 인덕 중턱에 나그네의 두 눈은 「뷔발레」산속에 격절(隔絶)한 세계인 「눈(雪)의 성모」 트라피스트수도원이라고 하는 흰 화강암으로 된 커다란 수도원을 보았다.
<후꼬오>는 32세였다. 오래동안 북아프리카를 돌아다니고 예루살렘까지 여행을 하고 온 그가 울타리 속에 틀어박혀 있고 싶어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나그네는 침묵의 집으로 가까이 왓다. 그는 입구에서 종을 쳤다. 두번다시 울릴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그 종소리는 얼마나 청명하고 무거운 소리였던가.
접대계의 신부가 문을 열고 이 손님을 대수도워장인 <동 말땅> 신부 곁으로 안내했다. 원장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꼬오>는 이미 그의 허가를 얻어가지고 있었으나 그 원의를 되풀이하여 원장은 그에게 관례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어떠한 것을 할 수 있읍니까』하고 질문의 맨 뒤에 <동 말땅>은 그에게 물었다.
『별로 잘하는 것이 없읍니다』 이것은 참말인 것이라. 한 수도자가 되기 위하여 도움이 될만한 것으로 <후꼬오>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아직도 모든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굳은 각오를 하고 있었다. 맨처음으로 원장은 그에게 비 한자루를 맡겼다. 얼마나 이상한 일일까 로마에서 제2위인 것 보다는 자기동리에서 제일인자가 되고싶다고 시이사는 말했다. 그러나 <후꼬오>는 천주께서 그것을 원한다면 오히려 제일 끝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의 제일야는 자유이었다. 그는 아직 세속 옷을 입은 채로 숙방의 일실에서 밤을 지냈다. 저녁식사 후에 그는 <마리>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아침 9시, 4시, 현제, 그리고 항상 나는 대단히 당신을 내몸 가깝게 느끼고 있읍니다. 그러나 나의 눈은 이제는 결코 또 다시 당신의 눈을 볼 수는 없을 것인데』
겨울밤이 수도원을 덥고 있을 동안 적실방에는 램프가 밤이 깊도록 켜 있었다. 그는 밤이 깊도록 자지않고 있었다.
그는 <마리>와 <카다리나>와 여동생과 숙모와 그에게 있어서는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 이밤중에 저 멀리서 그와 마찬가지로 깨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평생을 이와같은 사람들에게 생각을 두고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생애 가운데서 중요한 날자를 기입한 적은 수럽에 그들의 이름을 기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 이상으로 종자매인 <마리>가 없는 것을 통절히 느끼던 것이다. 어떠한 것도 그가 느낀 천주의 성소와 지상생활에의 애착 즉 그를 고독으로 이끄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열렬한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 아프게 느끼는 고통이 이중성을 지워버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는 또 <마리>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항상 자기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통쾌한 일입니다. 그와같은 행복을 이와같이 가슴싶이 느끼는데 어째서 그렇게도 멀리 가버렸을까 하고 당신은 반문할 것입니다. 나는 조금도 기쁨을 찾지 않았읍니다. 나는 「그 풍기는 방향」에 따라 우리들을 저만치 사랑해주신 예수께 따르려고 힘썼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따르는데 희열을 찾아냇다 하더라도 그것은 구하지 않고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희열은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다고 하는 고통을 깊이 느끼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습니다.』
사막의 스승들에게서 십자가의 성요왕이나, 같은 이 시각에 갈멜회수도원의 철장 뒤에서 눈을 뜨고 있는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비가들이 밤과 광명 속에서 어떻게 비극적인 결투가 은수자의 영혼을 찢어내는 것인가를 묘사하고 있다.
주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피조물은 자기 자신의 허무함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성자들의 생활에 있어서 황홀은 순간에 불과하며 복음서 가운데의 다볼산의 광휘와 같이 드문 것이다. 수도원은 우선 지복이 산에 기어올라가는데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엄격한 손잡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계율의 왕국인 것이다.
기쁨과 엄격함은 서로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 한편으로는 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 아니 사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람들을 정열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지상의 의무인 것이다』
그가 수도생활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천주였으며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가지각색의 쾌락이 오락에서 이탈한 것이다. 무감각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자가 스토아적 금욕주의자와 <요가>(인도의 금욕주의자)와는 정반대인 것은 이점에 있어서다. 그리스도는 일생의 가장 단순한 기쁨과 고통을 서로 나누어 받기 위하여 유데아 국민들 사이에 말석을 차지하여 온 것이다. 어떻게 <후꼬오?가 다른 길을 갈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인가. 이와같은 의지는 환영일까. <후꼬오>는 이렇게 자문했다. 그리고 그의 생애가 그 대답인 것이다.
여하간에 수도자 생활의 초기부터 그의 천직의 열쇠가 될 말은 그가 출발을 고할 때 <듀베리에>에게 보냈던 것이다.
즉 『왜 나는 트라피스트수도원에 들어갔을까? 사랑에 의해서 순수한 사랑에 의해서이다』
1월 27일 그는 입회지우원자로서 수도단체에 들어갔다. 그리고 10월 후에는 그는 성가대의 수련자의 의복을 입엇다. 그의 수도명은 <마리 알베릭크> 수사였다. 즉 나사렛의 성모와 같이 또 그에게 영감을 준 부인 <마리>와 같이 그리고 「시토」수도회를 창립한 성인들의 한 사람을 따라 <알베리크>라 하였다.
<알베리크> 수사는 그때부터 다른 수사와 마찬가지로 양털로 된 커다란 의복, 견의와 두건달린 수도복을 입었다.그는 방이 따로 없었다. 그것은 트라피스트수도자들은 공동침실에서 자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와 같이 광대한 거리를 즐길 수는 이제는 영영없었다. 잘 때에는 공동침실이 있고 때어있는 동안에는 수도원의 벽으로 가려진 얿은 장소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좁은 세계는 사막과 같이 광대한 것이다. 에리아나 요안 세자와 같이 예수는 나자렛의 공적 생활을 떠나서 40일간 사막에 은퇴하였었다. 그는 수련장 <우으제느> 신부의 지도하에서 수련기로 들어갔다. 그에게 준 최초의 서적은 성서와 「클레르보오」 수도원의 창립자인 성 벨라도의 저서였다.
수도원의 식당을 소재하고 성기실(聖器室)에서 잃라고 성가대에서 노래공부를 하고 어떤 때는 묵상이나 독서를 하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을 마음 속에 회상하고 한다해도 이 모든 것은 주께 대한 봉사라고 하는 다만 한가지 일에 전염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는 이미 하나의 커다란 비밀을 발견하여 그것을 <마리>에게 써서 보냈다.
『만일 내가 희열을 얻을 수 있다면 구하지 않고 얻는 것이다』 베드루 야곱 요왕이 예수와 함께 다볼산에 올라갔을 때 그들은 어떠한 행복된 순간이 빛나려 하고 있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레네」의 <시몬>은 병사들이 가시관을 쓰신 왕에게 손을 빌리라고 그에게 명했을 때 예수가 어디로 올라가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병사들은 그를 무리로 걸어가게 하 ㄹ수가 있었으나 그에게는 파괴할 수 없는 자유, 사랑의 자유가 있었다.
『이 슬픈 세계에 있어서 우리들은 결국 성인들도, 천사들도 갖지 못한 행복을 간직하고 있다. 가장 사랑하는 예수를 위하여 그와함께 괴로워하는 행복을』
이렇게 <발베릭크> 수사는 썼던 것이다. 그의 생활의 근저가 되는 것은 천주경의 욧점인 다음 말이다.
『하늘에서 이룸같이 땅에서 또한 이루어지이다.』 우리들이 생각지도 않고 외우고 있는 이 말을 그는 그의 모든 행위를 번용시키는 불타는 불꽃으로 삼았다. 이것이 왕도인 것이다. 부활첨례까지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간 것을 <유브랑> 신부와 근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었다. <듀베리에>에 새로운 세계에 출발한다는 것을 명백히 한 것은 겨우 부활첨례가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