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入門(입문) 講座(강좌)] (5) (承前) 왜 그들은 가톨릭인가
발행일1962-02-11 [제314호, 2면]
6, 신이 그의 교회를 가르침에 있어 그릇됨이 없도록 보호한다고 그들이 믿기 때문이다
만일 신이 자신의 가르침을 후세에 전할 목적으로 교회를 창설하였다면 그는 그 교회를 오류에서 보호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어떤 그릇된 것을 믿게 허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진리 그 자체인 신에게는 이러한 모순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신이 이것을 않는다면 그때는 마치 신이 『너 만일 둘에 둘을 가아혀 다섯이 된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함과 마찬가지이다.
신이 그의 교회가 허위(虛僞)를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고 또 인간의 구령(救靈)이 진리 아닌 것을 믿는데 달린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보아서도 신은 인간이 그의 교회의 가르침을 믿고 따름으로 구령하게 하였는 만큼 그의 교회의 가르침에 오류가 없도록 보호하여야만 한다. 이것을 가르쳐 가톨릭 교회에는 무류지권(無謬之權)이 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에 무류지권이 있다고 하는 것은 교역자(敎役者)들이 죄를 짓지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그들이 정치, 경제, 종교 문제에 있어 그르칠 수 없는 정확한 판단만을 내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톨릭교회가 구령을 위해 빋어야 하는 것으로 어떤 교의릘 공식으로 공포(公布)할 때에 그 교의는 그안에 아무런 오류가 섞여있지 않게 신에 의하여 보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도 <죠오지 버나드 쑈>(George Bernard Shaw)를 교황권의 선전가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무류지권이 완전히 논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아마도 「프로테스탄트」 독자들을 더 잘 가르쳐야 하겠다. 교황의 무류지권이라는 저 유명한 「독마」는 현재 우리가 알고있는 모든 「독마」들 보다 단연히 가장 온전한 주장이다. 우리의 그르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제도를, 우리의 그르칠 수 없는 의사회(醫師會), 우리의 그르칠 수 없는 천문학자들, 우리의 그리칠 수 없는 판사들, 우리의 그르칠 수 없는 국회들에 한번 비교해 보라!
교황은 땅에 무릎을 꿇고 어떤 역사적 사실에 있어 자기의 결정이 최종의 것이 되게 누구에게 보다도 자기에게 더 많은 조사의 재료를 보여 주십사고 기도드리면서 신의 제단 앞에서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그의 St. Joan에서)
「쑈오」의 이러한 고백은 무류지권을 믿는 것은 가톨릭교회를 맏아들이는데 지불하지 않을 수 없는 과도한 댓가(代價)가 아니라는 가톨릭의 수장에 동의(同意)하는 것을 의미한다.
냉정한 입장에서 고찰해본다면 교회의 무류지권을 빋는 것은 사실에 있어 사람들에게 더 유익하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 가운데 우리들이 참으로 확실히 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몇가지나 되는가?
이러한 세상에 신이 그의 대표자-가톨릭교회-를 세워 우리들이 그르침 없는 그의 가르침을 받겠금 한 것은 신이 인간에게 베푼 각별한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
너는 말하기를 『난 직접으로 신에게로 가고 싶다 내게는 아무 교회도 필요없다 난 눈을 가만히 감고 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을 신에게 말하고 싶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대답할 수 있다. 신에게 인간의 임무를 다하는데 너의 원의, 의욕이란 크게 중대하지 않다. 중대한 것은 신의 원의와 의욕이다. 현재에 있어서 신이 사람들이 직접으로 자기에게로 오기를 원하는가 혹은 교회를 통해서인가?
만일 직접으로 오기를 원하였다면 그는 교회를 창설하는 수고를 하였을리 만무하다. 만일 그가 교회를 세웠다면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을 원한다.
가톨릭이라 해서 반드시 교회를 통해 신에게 기도드리지 아니한다. 때로는 -사실은 아주 빈번히- 직접으로 신에게 기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가 남긴 말씀 『내 뜻대로 되지 말고 오직 당신 뜻대로 하소서』를 애용한다. 가톨릭은 성경에서 읽어볼 수 있는 소경이 그리스도의 힘으로 시력을 얻게된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소경에게 시력을 주는 기적을 할 때 그는 자기 발가까이 있는 흑에 춤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소경의 눈에 발랐었다. 이렇게 함으로 시력이 없었던 눈에 빛이 왔었다. 그러나 만일 그 소경이 그리스도가 그렇게 하는 것을 거부하여 『이 사람아 물러가라 그 더러운 춤으로 이긴 진흙을 내 얼굴에 바른다니 그 무슨 짓이냐? 내 눈에 광명을 주는데 진흙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만일 그 진흙으로 내 눈을 보게 할 수 있다면 왜 말로서 바로 내 눈을 고치지 못하느냐?』라고 하였다면 어떠한 결과가 왔을지 한번 상상해 보아라. 물론 그 소경이 한 말이 옳다 신이 기적을 행하는데 진흙이 필요하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영혼들을 구하는데 신은 교회나 사제(司祭)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소경을 보게하였을 때 진흙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신은 교회를 세워 이를 통하여 사람들의 영혼이 구해지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의사에서 된 계획이 아니고 신의 완전한 자유의지에 의해 계획된 것이다. 가톨릭은 신이 그들이 가톨릭이 되기를 원한다고 믿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