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94. 全南(전남) 羅州(나주)본당
장터서의 十字聖號(십자성호) 성당마련
現(현) 玄(현) 敎(주교)님이 초대주임
金(김) 시뇰 목숨걸고 지킨 곳
발행일1962-02-11 [제314호, 3면]
나주 읍내, 지금부터 30년전 5월 어느 장날이었다. 한달전 십팔은행(현저축은행) 지점장으로 이곳에 부이한 <마테오> 임탁일씨가 그의 아내 <루시아> 김씨와 함께 이 고장의 진물들을 구경하며 저자속을 두루 돌아다니고 있었다. 『뚜-』 때마침 정오의 「싸이랭」이 울렸다. 분산한 저자 속에서 이 두 내외는 잠시 마음속으로 삼종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옆에 있던 <누시아> 김씨가 그의 남편을 댕겼다.
『여보 저 사람 좀 보세요』 보인이 가르키는 맞은편 포목전 앞에 왼 남자가 비스듬히 서서 고개를 숙이고 가슴에 십자성호를 긋고 있었다.
반가움으로 가슴조차 두군거리는 이 내외는 흥정을 마치고 보따리를 싸들고 가는 이 소박한 사나이를 어느듯 뒤따르고 있었다.
이 장터 한복판에서 경건히 그어진 이 사나이의 십자성호가 주의 크나큰 성전을 이룩하는 거룩한 지표가 되었으니 그는 당시 노안(老安)본당 복사로 있는 <아오스딩> 이응범씨로 천주의 자녀로서 타향에서 외로운 임씨 내외를 본당 <요안> 박 신부님께 인도하여 의논 끝에 임씨댁에다 공소를 설립하고 그해 5월 첫미사를 드리게 된 것이다.
그후 2년이 되어 50명의 영세교우를 내었으며 1934년 골롬반 전교회에서 나주 서문(西門)안 현재 교회부지 3천평을 매입, 임시성당 50평과 사제관을 건립하여 초대본당신부로서 1935년 5월에 현 광주교구장 현 주교님(당시 신부)이 부임하였다.
현 주교께서는 동년 9월 27일 성당 내에 해성학원을 개설하고 교사 1명에게 생도 60명으로 당시 일제 식민지 탄압속에서 한국의 이세교육에 진력하셨다. 1937년 교사로 35평을 신축하고 생도 1백20명을 증가했고 매괴성당으로 80평을 축성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의 탄압은 날로 극심하여갔고 드디어 1941년 대동아전쟁이 발발, 즉시 현 주교님은 강금되고 이듬해 4월 본국으로 강제 송환당하였다. 이로인해 교세는 일시 침체되어갔다. 1945년 5월 <스더왕> 김신부가 본당신부로 계시다가 별세하였고 당시 함평, 영산포 두 공소가 분립되었으며 지금은 남평, 산포 2개 공소가 남아있다.
현재 본당을 맡고 계신 김 몬시뇰(昌鉉) 께서는 6대본당신부로 1954년에 취임하신 이래 교세 날로 확충되어 현재 신자수 3천2백1명에다가 작년에 6백70만환을 들여 성당 증축공사를 완료하였다. 또한 성소증진에도 주력하시어 대신학생 3명 소신학생 4명, 수녀 3명을 길러 내셨고 레지오 꾸리아, 뿌레시디움, 소년소녀뿌리시디움의 조직으로 전교활동도 혁혁하다.
이곳은 순교선열의 피로 물든 거룩한 터전으로 잊을 수 없는 고장이다.
전라북도 용담사람 <바오로< 김영원님은 남의집 품팔이 하는 가난한 농부였다. 구한국 신미 동짓달 어느날 길거리에서 나주 포교에게 붙들려 <안드레아> 유님과 같이 나주 무학당에서 돌에 맞아 치명하였다.
삭별리 <바오로> 강님과 <베드루> 이님 역시 포졸에게 잡혀 옥중에서 참수치명을 당하였으니 때는 1839년 11월 어느날이었다. 김몬시뇰께서도 두번이나 옥중에 계셨고 1950년 공산군이 남침 삼엄한 총뿌리 아래서 피난못한 교우들과 머물러 계시면서 마루밑에 토굴을 파고 은신하고 가마니 속에 숨어서 성직 사명에의 정열은 백절불굴이었다.
『한국신부는 국산품을 써야해』 『파이프』에 토산엽초를 담으시며 그는 평소 술도 탁주만을 즐겨 드신다니 어디까지나 소박한 그의 성품은 교우들의 가난하고 자애로운 어버이 바로 그것이다.
교황께서 그의 이러한 덕과 많은 공로를 치하하신 나머지 <바오로> 김창현 신부를 명예주교로 선정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