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20) 쥬유르 베르느 風(풍)의 農地(농지) ①
발행일1962-02-11 [제314호, 4면]
<알베리크> 수사는 눈의 성모수도원에서 반년을 지났을 뿐이었다.
1890년 6월에 그는 다른 트라피스트수도원 즉 시리아에 있는 성심의 성모수도원에 옮기기 위하여 그곳을 떠났다. 어째서 그곳을 원했나하면 성심의 성모수도원은 눈의 성모수도원보다도 훨씬 빈한한 수도원이었기 때문이다.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그의 이런 희망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는데 12일간이나 걸렸으나 그는 이 여행도 휴가로 삼지는 않았다. 배위에서 될 수 있는대로 수도회 규율을 지켰던 것이다.
7월 9일 그는 알렉산트렛트의 항구에 상륙했다. 혹심한 더위였다. 그 햇살은 아시아 특유한 것이었다. 이 수련자는 잔교(棧橋)까지 마중을 나온 <예치엔느> 신부의 영접을 받았다. 두 사람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는 동반하여 내륙지방으로 향하였다. 터어키인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또 「크루드」족의 병사에게 호위되어 두사람은 나귀를 타고 길을 갓다. 유데아교 제관의 의복 대신에 트라피스트수도자의 의복을 입고 있지 않았더라면 <알베릭크> 수사는 또한번 자기가 모록코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터어키 통치하에서의 신변의 안전은 「세리프」의 지배하에서와 마찬가지 정도로 마음놓을 수 없을 것이었다. 한참동안 길은 「아마누스」의 산을 통해서 꾸불꾸불 구비쳐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험악한 산허리의 바위사이를 깍아내린 길이었으며 손잡이 난간이 없었다. 도중에 보행자와 말을 탄 자와 대상과 양떼를 몰고가는 목동들과 마주쳐지나갔다. 길을 벗어나면 산에서 산적이 출몰한다. 또는 때때로 성의 천주각이나 요새의 폐허들이 우뚝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 길은 「베일란」의 고개였다. 이곳은 침략해 오는 외적의 군대가 반드시 모두 통과하는 지점이었다.
앗시리아인, 페르샤인, 희랍인, 로마인, 아라비아인, 터어키인 등의 군개다 안치오키아의 광대한 평야를 향해서 조수와 같이 밀려왔던 것이다. 두사람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는 또다시 저편으로 내려가 길을 바꾸어 작은 길로 들어섰다. 이 소로는 숲을 지나 우선 그들을 「아크베스」의 작은 동리를 지나서 또다시 낮은 지방으로 통했다
나귀 등에 오른지 2일이 지난 두번째 밤에 두사람의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낮은 지방을 빠져나와서 높이 800메타 되는 곳에서 황막한 봉오리로 둘러싸인 넓은 계곡을 발견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 산에는 우산과 같이 펼쳐진 커다란 소나무가 전면적으로 심겨져 있었다. 그밑에는 잣나무, 그리고 야생의 오리브나무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깎아내린 듯한 회색빛 바위가 솟아있으며 그 바위에는 동굴이 여러개 꿇어져 있었다. 거기에는 사슴이 떼를 지어 있다. 또 겨울에는 이 주변에는 이리와 표범과 곰과 산돼지들이 대단히 많아 모여드는 것이었다』고 <후꼬오>는 말하고 있다.
풍부하며 가축용 목장이 여기저기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광폭한 야수를 막기 위하여 말뚝과 가시덤불로 둘러싸여있다. 그러나 수도원을 보면 눈의 성모수도원의 커다란건물과는 비료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송판과 진흙으로 만들어진 초가지붕의 작은 집들을 주어모은 것이었다. 침입자와 도적을 두려워하여 광과 가축을 기르는 작은 집들이 모여있는 곳에 세워져 있으며 마치 그것은 「주우르 베르느」 풍(風)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커다란 나무그늘 사이에 있으며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로서 윤택을 내고 있었다…』
금수와 산적들이 횡행하는 산속에 있는 수도원의 건물은 「밀지우스」풍의 우아에 가득차 있는 섬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30년 전에는 이 지방에 사람들이 살고있었으며 현재에 완전히 황폐하게 되어버린 지방에도 주민들이 살고있었으나 폭동이 뒤이어 터어키 사람들이 이곳을 황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터어키인도 그들이 이러한 장소를 만든 것이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라고 <알베릭크> 수사는 말하고 있다.
1882년에 눈의 성모수도원의 수도자들은 자기들이 프랑스 국외로 추방될 위험성이 있음을 알았으므로 다른 장소에 피난처를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터어키인들이 폐허로 만든 이 계곡에서 찾아냈던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성심의 성모에게 봉헌된 수도원 지부를 설립했던 것이다. <동 말탕>의 친형제인 <루이 드 곤사아크>씨가 그 수도원의 초대 워장이었다. 이처럼 <알베릭크> 수사가 여기 오기전 약 8년전에 개척자로서의 힘드는 일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계곡에는 보리, 밀, 야채, 면화, 포도 등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해 동안 쉬지않고 갖은 신고를 다하여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과 같이 되게한 것도 농업노동자가 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산적을 그만두고 산에서 내려온 「쿠르드」족의 장정 몇사람의 손을 빌려서 수도자들이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1890년 당지에도 역시 대단히 힘드는 노동이 그날그날 계속되고 있는 때였다.
성심의 성모수도원의 수도자들은 훌륭한 수도원을 건설할 여가도 재원도 갖지 못했었다. 개척다로서의 시대는 훌륭한 건물을 건축하는 시대는 아닌 것이다.
오늘의 수도원의 건물은 마치 아메리카 신대륙개발시대의 그 선구자들의 오막사리집과 흡사하였다. 모두가 거칠은 가건물들이었다. 여름동안은 수도자들은 가축을 기르는 헛간의 다락에서 거쳐했다. 그곳은 판자사이로 밑에서 가축들의 냄새와 시끄러운 소리가 새어 올라왔다. 겨울이 돌아오면 식당위에 있는 다른 지붕밑 다락으로 옮겼으나 그곳은 눈이 쌓인 함석지붕의 바로 밑이었다.
이와같은 빈약하고 보잘것 없는 청빈 속에서 <알베릭크> 수사의 영혼을 끌어 당기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읻. 예전에 그리스도교의 최초의 은수자들이 살던 사막이 그리멀지 않는 아시아의 이 지방에서 그는 자기가 별안간 원시적인 시대의 간소한 생활로 되돌아간 것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 간소한 생활은 성벨라도의 친구인 <기욤 드 쌩체르리>가 이미 노스탈지를 품었던 바로 그것이었다.
『관상의 간 위에서 천주의 집의 진실한 아름다운 모습을 본 자는 그것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청빈의 이상과 성스럽고 더욱이 우아한 간소함과 그들의 스승에게서 계승해받은 소박한 구도를 따라서 자디글을 위해서 자기 스스로 세워야 할 것이다. 직업적인 직공의 솜씨라 할지라도 그들의 서투른 솜씨만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베릭크> 수사에 있어서는 모든 것은 그가 나자렛에 더욱 가짜워진다는 것 만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너는 내가 있는 이 수도원의 모습과 우리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알고싶은 모양이다』 그는 동생에게 이렇게 썼다.
『이곳에는 수련자까지 포함하여 전원 20인 가량의 트라피스트 수도자가 있다. 너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들은 굉장히 넓은 건물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광대한 경작에 필요한 소와 산양, 말과 나귀 등 모든 가축이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살고있는 집 밑층에는 5세에서 15세까지의 가톨릭 신자인 고아가 15명에서 20명 가량 살고있다. 또 이것도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보호되어 있는 수도자 아닌 평신자 노동자도 적어도 10명 혹은 15명가량 있다. 그리고 때때로 손님이 있단다.
수도자는 본질적으로 알지못한 사람을 환대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도 잘 아는 사실이다. 너도 <몬타랑베르>가 쓴 「지방의 수도자들」을 읽고 우리들의 생활을 충분히 네 마음 속에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책에 그려져 있는 것과 우리들 사이에는 일종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그가 그 책 속에서 말하고 있는 수도자는 우리들보다도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원고를 청서하는 일같은 것을 우리들보다 더하고 있다. 우리들의 제일 중요한 큰일은 밖에서 하는 밭일이다. 겨울에는 숲속의나무를 끌어내리며 봄에는 포도밭을 배내놓고 여름에는 마른 풀을 베어쌓고 여러가지 수확을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일인 것이다. 그제께 우리들은 수확을 마쳤다. 그것은 농민의 일이지만, 기도와 명상의 능력인 영혼에 있어서 무한히 효과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전에 이 일을 하지 않을때 생각하던 것보다는 매우 괴로운 이 노동은 빈자에게 대한 깊은 동정, 노동자, 경작자에게 대해서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져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람은 한 쪼각의 빵을 만들기에 얼마나 힘이 드는가를 몸소 경험했을 때 그 한 쪼각의 빵의 가치를 어마나 명백히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일까.사람은 서로서로 일을 나눠할 때 비로소 처음으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