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會見記(회견기)
敎會(교회)의 普遍性(보편성) 諸問題(제문제)
共産主義(공산주의)·라띤語(어)의 將來(장래)
발행일1962-02-18 [제315호, 4면]
오날, 교회생활에 있어서 평신도의 보다 풍부한 참여에 관한 많은 토의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평신도는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서의 임무에 관하여 충분하게 협의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도 적지않다. 불란서 「리옹」에서 행해진 <죠셉 포리에>씨와의 인터뷰를 통한 다음 내용은 대공의회르 앞둔 한 평신도의 지적(知的) 관점을 말하고 있다. <죠셉 포리에>씨는 서구라파에서 잘 알려져 있는 가톨릭사상가요 편집인이며 작가이다. 그가 최근에 저술한 『오늘날의 세계 가톨리시즘』에서 현세 교회의 제문제를 세밀히 관찰하였다. 그는 사회학과 정치학 박사이며 「토마스 아키나스」 철학과 신학의 학위를 가지고 있다 또한 「몬트리올」대학과 「코롬비아」대학의 명예학위도 수여받았으며 「리옹 가톨릭학회」의 일반사회학 교수를 역임했고 「끄로니끄 쏘시알 드 프랑스」지의 편집인이다. (아메리카紙 所載)
문=<포리에>씨, 교회사에 있어서 전환점(轉換點)에 놓여있는 현 교회의 위치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십시요.
포리에=그와같은 광범위한 질문은 오직 폭넓고 불완전한 대답으로서만 추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첫째로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오늘날 전세계 3분의1일 정복하고 있고 남은 3분의2마저 정복하려고 서두르고 있는 세계 공산주의의 존재와 그 활동입니다. 교회로 볼 때는 공산주의야말로 전례(前例) 없는 문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중세기(中世紀)와 「루네쌍쓰」시대에 있었던 그와같은 다른 이단(異端)이나 교회분열과 직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최소한 어떤 조교적 요소는 가톨릭신자와 교회분열자 또는 이단자에게도 공통으로 잔존(殘存)하고 있읍니다. 교회는(마치 교화(敎化)의 그것과 같은) 이성론적(理性論的)인 신비주의(神秘主義)와 논쟁하지 않았으며 19세기의 물질주의(物質主義) 오욕(汚辱)과도 돌격적으로 대항하지는 않았읍니다. 이것은 그들의 내적 반항을 인정(認定)함이 없이 객관적 진리와 공번된 도덕으로서 믿음을 명언(明言)했엇다는 뜻입니다. 공산주의의 새로운 이단(異端)은 또한 역사의 한 부분이며 엄격히 말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완전한 「프라그마티즘」(功利主義)인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비단 신(神)과 영혼의 존재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객관적 진리와 공번된 도덕을 거부하고 잇읍니다. 또한 본질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대립은 오로지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 사이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재래의 이단사상과 공산주의 신이단(新異端) 사이에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공산주의 「씨스템」의 경제적 성취 등의 의의를 포함한 것은 아닙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엄격한 방비와 같은 동일한 반응의 결과는 더욱 중대하고 결정적이어야 합니다. 공산주의 「씨스템」의 사악(邪惡)에 구애됨이 없이 공산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서 구속(救贖)된 사람들이며 교회는 그들에게 구세(救世)의 멧세지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교회가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데 있어서 교회는 교회자체를 좁히지 마라야 하고 과거를 주시(注視)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이와반대로 교회는 신(神)과 인간과의 관계를 제시하면서 교리와 생명의 가장 절대적인 반향을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미래에 얼굴을 돌려야 하며, 모든 인류의 눈앞에 교회가 광휘(光휘)를 체현(體現)케 하는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을 이룩하는데에 열렬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맑스」주의자와 철의 장막 뒤의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교를 모르는 국가의 사람들에게 사용될 변증(辨證)적이고 교리적인 가르침을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문-교회의 보편성(카토리시티)이 오는 대공의회에서 취급될 문제의 하나라고 보여집니다. 이에 대하여 말씀드려주시기를……
포리에=앞으로 더욱 더 단결될 세계에서 교회는 과거 어느때보다도 더욱 많은 가톨릭신자를 내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종족(種族) 언어 국가적 문화적 전통에 구애됨이 없이 교회 안에서 생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앞날의 문제는 아프리카와 아세아에 있다고 봅니다. 만일 우리들이 교회가 「활동」하고 있음을 본다면 우리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또 요구되는 이 보편성(카토리시티)으로부터 아직도 거리가 멀다는 것을 부득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역사적으로 볼 대 교회는 서방문명, 즉 서방적인 사상 형태와 풍습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겝니다. 또한 교회는 전교지방에서 방인사제를 내고 교구를 세우는데에 활발하였읍니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노력이었읍니다. 그러나 또하나 중요한 제2의 문제가 있읍니다. 그것은 교회의 라띤어 전용(라띠니티)입니다. 서방 문명에 있어서 교회는 정신적 수도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라띤 민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읍니다. 한 때는 역사적으로 용인되고, 혹은 피치못했던 이와같은 위치는 오늘날까지 계속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3위의 선교황님께서도 공번됨의 이 점을 명백히 하기 위하여 노력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