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82) 水原(수원)
『典禮 參與를 奬勵』
자랑은 明道會 활동
발행일1961-10-01 [제297호, 3면]
『동문(東門)은 도망가고 서문(西門)은 서서있고, 북문(北門)은 부서지고 남문(南門)은 남아있다』는 수원(水原)은 웅대한 옛 성문과 더불어 성지(城地)가 많이 남아있어 찬란했던 옛날을 추억케 함과 동시에 세상 영화(榮華)와 권세의 허망함을 말하여 주는듯하다.
그 옛날 나라의 도읍(都邑)을 이곳으로 옮기려고도 했던 시절이 있는 곳이다. 산수(山水)와 입지적(立地的) 조건은 갖추어진 고장이지만 현재 산업면에 있어서는 공업이나 상업 도시가 아닌 인구 8만 남짓한 이 옛읍내는 서울 특별시의 한 위성도시(衛星都市)라고나 할가?
서울에서 뻐스로 한 시간 반이 걸려 이곳에 도착한 기자는 북수동(北水洞)본당을 먼저 찾았다.
◎북수동본당
거금 69년 전인 1892년 「빠리」외방전교회원 <요셉·알릭스>(韓) 신부가 창설한 이 본당은 <샤르르.르 가>(鄭), <아오스딩> 김(金元永), <루이.르메르> 이(李) <앙리.끄랑프> 경(慶) <안드레아> 박(朴一圭), <띠시레리오.뽈리> 심(沈), <요셉> 이(李福永) 신부 등 여덟분의 신부님들이 약 70년의 세월 동안 이 본당을 거쳐가시기도 하고 혹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나시기도 하여 현재의 주임 <바오로> 임(林鐘求) 신부님으로써 제9대의 본당신부를 뫼시고 있는데 교세(敎勢)는 2년에 고등동(高等洞)본당을 신설하여 살림을 나눈 후에도 현재 2천5백명의 신자를 거느리고 있어 젊은 보좌 <귀엘모> 김(金得權) 신부님의 사목(司牧)을 도와드리고 있다.
제7대 본당신부였던 <띠시레리오.뽈리>(_) 신부님의 재임시인 1932년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933년에 낙성을 보게된 현 성당은 6·25 때 전재를 입어 1부 파괴된 것을 1954년 9월 <요셉> 이(李福永) 신부님이 복구 공사를 완료하여 현재에 이르렀는데 건평(建坪) 약 80평 되는 규모에 있어서는 큰 건물은 아니나 아담한 째임새는 요즈음의 흔한 「모던스타일」의 성당들에 비해 무게를 지니고 있으며 「코틱」식 종탑에 아침, 낮, 저녁 세 번씩 울리는 아름다운 종소리는 시민들의 가슴에 무엇인가 천상적인 것을 색여줄 것으다.
그 『신자들을 이끌어 가는데 있어 신부님이 특별히 강조하시는 「못토」는 무엇입니까?』하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 『그런 특별한 것은 없어요. 다만 내가 교우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은 미사와 교회예절의 뜻을 알고 참으로 마음 속으로부터 참여(參與)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본당으로 부임해 온 후로는 미사해설의 「팜프렡」을 만들어 교우들이 많이 읽게할 뿐만 아니라 합송(合誦)미사로써 미사성제에 적극적 참여를 하도록하며 그밖에 교회_ 여러 예전(禮典)에 참되히 참여하도록 하는데 힘쓰고 있읍니다』
그리고 이어 임신부님은 이 지방 사도직 운동의 한 자랑꺼리인 『명도회(明道會)』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즉 30여 년의 역사를 갖고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이 평신자 사도직 단체는 현재 부인들로써 약 20여 명의 「멤버」를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매주(每週)마다 지도신부의 지도 아래 교리공부와 주회합(週會合)을 가지며 활동으로는 영적 꽃다발 바치기와 병자와 가난한 이의 가정방문을 하며 매월(每月) 5일간 전교(傳敎)를 위한 특별의향을 공동(共同) 기구가 있고 매주 금요일은 공동으로 성로(聖路) 신공을 바치며 이밖에 그들이 병자나 가난한 외교인들의 가정방문 때에 쓸 자선(慈善)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비누」를 생산공장에서 도매금으로 사와서 팔므로서 남는 이익을 이에 충당하는 등 실로 오늘날의 「레지오·마리에」와 「원선시오회」의 활동과 같은 일을 30여 년 전부터 계속하여 왔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