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23) 노동자의 집 ②
발행일1962-03-04 [제317호, 4면]
1894년 4월에 <알베리크> 수사는 죽은지 얼마 안되는 아라비아인으로 가톨릭신자인 어떤 노동자의 유해 옆에서 기구하기 위하여 근처의 빈촌에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후꼬오>는 고인의 허물어진 오드막집에 들어가자 가슴깊이 감동되었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는 대단히 심각한 빈곤을 찾아낸 것이다.
그 심각성은 수도자들의 가난한 생활이 빛을 잃을 정도였다.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세속의 세계를 포기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지금 막 죽은 이 사나이는 이보다 더 심한 가난한 생활을 한 것이다.
수도자들은 넓은 토지를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도웁고 격려하는 여러사람으로 된 수도단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가정을 유지하는데 성 요셉과 같이 다만 혼자였다.
『이 오두막집과 우리의 주택과의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하고 <알베리크> 수사는 외쳤다.
『나는 나자렛을 열망한다』
지을 수 없는 이메지가 그의 영혼 속에 맹열히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이 아로새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벌써 일년이 지나가 버렸다. 숙망과 인내가 그의 혼을 만력기(萬力機)와 같이 조였다.
95년에 그의 종자매 <마리>의 남편 <오리비에 드 뽕디>가 죽었다. 그무렵에도 그는 <유브랑>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이보자 조금 후인 11월에 시리아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주위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계속하여 발생하였으므로 그의 마음이 더욱 상했다.
『폭동을 일으킨 것은 쿨트족이 아니라 그것은 알메니아의 그리스도신자들이었으며 토이기인은 무시무시한 학살을 하기 위하여 그것을 이용하고 있다. ……우리의 주위에는 공포가 무수한 학살과 불과 약탈이 있었다. 수많은 그리스도 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순교지가 되었던 것이다. 보도로 걸으면 이틀 걸리는 사방 저쪽에 있는 우리들 「아크베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은 살해당할 예정이었다. 나는 거기에 적합하지 않았었다. ……유우롭인들은 터키 정부에게 보호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안전합니다. 우리 형제들의 목을 짤라버리는 인간들과 이와같이 협동해 간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유우롭은 이와같은 참사의 발생을 막을 수가 있었을 터인데 그것을 태만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부끄러운 일이 천주의 어떠한 별을 초래할 것입니까』
이 커다란 비극은 더욱 <알베리크> 수사의 소원에 불을 질렀다. 커다란 수도단체에 있어서 자기가 보호되어있다고 느끼는 것 그리고 민중의 비참과 비극적 사건을 완전히 나누어 가질 수가 없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더욱 괴로웠던 것이다.
그는 트라피스트 수도회를 떠나려고 생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96년 2월에 또다시 3년의 유기서원을 갱신한 만큼 그는자기 소원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
1895년에 그는 또한 「소뮤으르」의 옛 친구 <모레스>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모레스>는 사하라의 탐험가가 되어 6월 5일 <듀배리애>와 같이 「엘 와티아」에서 「투 아레그」족에 의하여 살해당했던 것이다. 또하나의 성소가 지나가버렷다.
이 쓰라린 인내의 기갈중, <알베리크? 수사는 과연 실현하게 될런지 어떨런지를 알지 못하는 그의 계획을 쉬지않고 연마하고 있다. <모레스>가 죽은 그달에 그는 지기가 몽상하는 비둘기 집에 『예수의 작은 형제회』라 이름을 부치고 자세한 점에 이를기까지 그의 회측을 편성하고 있다. 이 최초의 계획은 1856년부터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계획중에서 이와같은 수도단체는 작은 동리의 속이나 혹은 시외, 아무런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세울 것이며 그 지방에 가장 가난한 집, 초옥이라던가, 바락크 같은 것과 흡사한 집을 빌리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내부에서는 종사하는 일과 기구의 의무를 하기 위한 것 이외에는 영원한 침묵이 지배될 것이다. 일은 수도자의 집속에서 행해진다. 그것은 가장 간단한 손으로 하는 일이며 즉 가장 무지한 가장 허약한 사람들과 일을 하기 위해서이며 또 정신이 묵상하는 자유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의복은 이 지방의 가난한 자와 같은 것을 몸에 입는다. 음식에 대해서 <알베리크> 수사는 두때의 식사를 인정햇으니 대단한 양보를 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 한끼는 곡류로 도니 죽 그것도 소금과 물로 간을 맞춘 것 뿐이며 또 한끼는 빵 반근 뿐인 것이다.
그러나 주의 날을 축복하기 위하여 일요일마다 수도자들은 약간의 우유와 물과 뻐터와 과실을 먹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점에 관하여 대단히 관대한 취급을 하는 것이 허락되는 것은 다만 병자에 한해서이다.
병자들은 완전히 만족할만한 상태에 두어야 할 것이다 라고 <알베리크> 수사는 기록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도자들은 최하의 범주에 있어서의 급료를 받을 것이며 셋집을 사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금단구(禁斷區) 내에서 사는 수도자들인 것이다. 기구도 신중히 할 것이다. 라띤어를 모르는 사람들을 멀리하기 쉬운 성무일과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미사와 영성체 산종경, 성로신공, 묵주신공 등 즉 수도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소박한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것만이 행해진다.
어떠한 건설도 <알베리크> 수사가 길에서 앗시지의 <성프란치스꼬>와 같이 『귀부인 같은 청빈』을 맞났다는 것과 같은 얘기는 전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가난한 생활에 대하여 얼마나 믿기 힘들 정도로 격렬한 정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트라피스트 수도원 근처에서 죽은 아라비아인 노동자의 가련한 집이었으나 예배의 빛을 통하여 변용된 집이었던 것이다. 그가 꿈꾸는 나자렛은 이와같은 것이었다.
20년 후에 제일차대전이 끝나자 <프랑스 카프카>가 이와같은 자발적인 비소유자의 노동자공동체를 꿈꾸게 된다. 『예수의 적은 형제회』와는 달라서 그 공동체는 적어도 이 말의 종교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전연 수도단체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도 가장 간단한 의복, 제도구, 서적, 약간의 식량,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치 않으며 최소의 임금가치의 노동으로서만 스스로의 생활을 세우려 하지 않고 참으로 필요한 것, 즉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만을 먹으려고 결심한 사람들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사람들은 그들의 소유물 전부를 빈구원(貧救院)이나 시료원의 건축을 위하여 기부한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후진지역에서 빈민들의 집에서』 그들은 교육자들도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적으로 위대한 숨은 신비에 촉진된 <카프카>의 영혼은 그와 동일한 이상을 보았던 것이다. 즉 대중이 겪고 있는 현재의 비참을 몸으로 같이 체험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실현할 수가 없었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밧줄에 묶인 <알베리크> 수사는 천주의 이름으로 이와같은 꿈을 실현할 수가 있을 것일까. 그는 <유브랑> 신부에게 자기의 계획의 사본을 보냈다. <유브랑> 신부는 그의 사본을 보고 대단히 놀랐다.
『당신의 회측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프랑치스꼬회측에서도 교황은 이것을 승인하는 것을 주저하셨읍니다. 교황은 그것이 너무나 과격하고 과격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이 회측은 솔직히 말하면 완전히 나를 놀라게 하였읍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과 같은 빈곤속에서 그것에 적합한 수도단체의 한 구석에서 지내시요. 그러나 회측을 쓰는 것은 하지마시요. 불허합니다』
이리하여 <유브랑> 신부는 그와같은 수도단체의 창립에 반대했으나 어떤 수도원의 한 구석에서 천주를 마칠듯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단독으로 살기 위해서 <알베리크> 수사가 트라피스트회를 떠날 권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알베리크> 수사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동 <포리카르프> 신부와 그의 직접수도원장인 <에치엔느> 신부와 그리소 <동마르땅> 신부에게 또다시 청원했던 것이다.
이들은 그의 간청을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로마에 있는 트라피스트회의 총장 <동 세봐스티앙>의 허가를 얻기 위해서 잠시 시다리라고 요구했다. 9월 10일 <동 세바스티앙>에게서 회답이 왔다. 거기에는 <알베리크> 수사를 「스타웰리」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으로 출발하도록 권했으며 뒤이어 그곳에서 새로운 지시를 받게 될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