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사)순절 전례 解說(해설)
歷史=默想=生活
四순절과 信仰生活
봉재=門前(문전)에 이르러
발행일1962-03-04 [제317호, 4면]
복음서에 사순절에 대한 말이 없다. 종도들도 사순절을 몰랐다. 그러면 어찌해서 교회생활 속에 사순절이 큰 ㅏ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복음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로 마친다.
복음서는 「빠스가」 축일은 그리스도교적 축일의 가장 오랜 것이다. 사순절을 잘 이해할려면 「빠스가」를 생각하라. 예수의 부활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약속의 땅의 문을 열 것이다. 옛날 헤브레아인의 사막의 체류가 약속한 땅에의 도착을 준비하였는고로 「빠스가」를 더 잘 거행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은퇴하는 것이 좋다. 「빠스가」의 밤에 영세할 자는 그리스도신자 되기를 준비한다.
이미 영세한 자는 천주의 빛을 향하는 걸음 속에 그들과 동행한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였다. 사람은 그가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할 때만 용서를 얻는다. 통회하는 시절은 우리에게 「빠스가」의 기쁨을 준비할 것이다. 이렇게 차차 교회 첫세기들이 경과하는 동안 신자들은 「빠스가」 를 준비할 필요성을 느끼었다. 어떤 이는 사막으로 물러가고 다른 이는 영세준비에 마음쓰고 마침내 어떤 이는 통회의 업적을 쌓아올린다. 이 모든 것이 「빠스가」를 준비하는 마음에서이다. 사순절 미사경은 이 여러가지를 묵상케 한다.
벽포(壁布)에 다른 색실(色絲)이 서로 얼키어 짜인 것과 같다. 사순절이 프르는 가운데 거기 아름다운 조화가 있음을 더 잘 파악할 것이다.
헤브레아인들은 홍해를 건너 에집트의 노예상태를 면하였다. 그럴지라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전에 40년동안 사막에 머물러야만 하였다. 이것이 신시이 생활이기도 하다. 그는 성세의 물로 사탄이 권세에세 모면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약속의 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를 향하여 가는 도중에 있다. 첫 종교적 체험은 이 사막에서 시작된다. 이 사람들이 처음으로 참천주를 믿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보다 먼저 「아브라함」과 성조(聖祖)들이 있었다. 그러나 성조시대는 종교가 한가족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모이세>와 함께 「시내」 사막에서 한민족의 종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이 민족은 사막에서 산 유랑민이다.
천주의 백성의 종교적 체험이 시작된 것은 사막에서였다. 「시내」 산밑에서 <모이세>가 모은 이 종족이 한종교집단을 만든다. 이 집단은 이름이 있다. 「가할」(Qahai)이라 불렀다. 이 희랍어를 번역하면 교회(Ecclesia)란 뜻이다. 교회가 사막에서 시작한다. 40년동안 사막에서의 생활이 교회의 시작이다. 유태교는 이 유량이 기원의 추억을 생생하게 보존하였다. 매년 이 백성은 천막밑에 살기 위하여 예루살렘 문앞에 모여야만 하였다. 『너희가 이렛동안 초막 앞에서 머물러야 하되 이스라엘의 모든 본토박이는 다초막에 머물지니 이로써 내가 이스라엘 후손을 에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올 때 그들로 하여금 초막 안에 머물게 하였음을 너희 후손대대에게까지 알리고자 함이니라』(레위기 23장42-43)
교회는 우리에게 초막밑에 살라고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매년 사순절 때 사막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모이세>에 대한 묵상 사막에서의 이 백성의 유랑의 생활, 약속이 땅을 향하는 걸음에 관한 중요한 구절 몇개를 다시 읽도록 한다. 사순절은 우리를 위해서 유태인의 장막첨례와 마찬가지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생각케 해주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결정적으로 머물 곳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게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올리기 위하여 안락을 피하게 해주고 마침내 약속의 땅을 향하여 일생동안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발견케 해준다.
우리시대에 『바이불과 전례』이란 테마로 전례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신자들이나 성가대는 적어도 위대한 성서적 아이디어의 기초적인 인식이 잇으면 좋겠다. 사순절에 『바이불과 전례』의 테마를 성가대와 신자들에게 주는 모임이 있으면 한다. 이 모임이 성서의 「텍스트」 위에 작곡된 종교적 「인스피레션」을 가진 걸작음악을 묵상하는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왜 성서 「텍스트」를 읽은 후 <박흐>의 『수난곡』이라든지 <하이던>의 『천지창조』 혹 <헨델>의 『메씨아』 같은 걸작을 참으로 묵상감상할 수 없겠는가. 불행히도 우리는 이러한 걸작품을 종교적으로 감상할 줄을 잊어버리고 있다.
마치 천주께 영광을 돌려보낼 자격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현대와 신앙 사이에 가로놓여있는 구렁텅이를 적게하기에 공헌하는 창조된 가치를 무시하는 수가 있다. 사순절동안 많은 영적 수획을 거두시기를 『우리를 도우시러 일어나소서 그리고 당신의 자비때문에 우리를 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