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구라파의 가톨릭 신학자이며 「뮨헨」 대학교의 종교철학 교수인 <로마노 과르디니> 몬시뇰이 3월 4일 주일 ABC 테레비 방송망의 『62년도의 방향』 프로에서 30분간의 『테레비 인상』 시간을 맡게되었다.
이태리 태생의 독일 시민인 그는 구라파문화에 기여한 그의 다대한 공로로 인하여 1962년도 「에라스무스」상을 수여받았다.
현존하는 위대한 인문학자(人文學者)인 75세의 그는 오늘날 미술, 문학, 및 과학으로부터 종교에로 통하는 교량(橋梁)을 건실하여 놓았다. 그의 크고 검은 눈은 백발의 머리가 빝나고 있음과 같이 광채를 내고 있으며 그의 우아(優雅)한 손은 말할 때에 웅변가 답게 또 품위있게 움직이고 있다.
수많은 철학가와 과학자들은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모여들고 젊은 청년들은 그를 찾고있으며 농부와 노동자들은 그안에 직각적인 새로운 신앙심을 찾게되었다. <과르디니> 몬시뇰은 미술, 전기공학(電氣工學), 철학, 문학, 및 영화 제작에 있어서 최근의 동향에 관한 것 등 광범위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방면의 인문학자로서의 위치 뒤에는 문명의 모든 실마리를 천주께 향한 인도(引導)에로 엮어나가고 있다. 또한 <과르디니> 몬시뇰은 작가(作家)로서 전세계에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연구서(硏究書) 『더 로드』(主)는 7개국어로 번역되었고 백만권 이상이나 판매되었다. 또한 <리르케>에 관한 그의 저서는 독일 시단(詩壇)에 대한 결정적인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만 하더라도 매해마다 미국 내에서 그의 또다른 서적들이 출판되었었다.
<과르디니> 몬시뇰이 가지고 있는 세개의 책꽂이에는 자기 저서로서 꽉차고 있으나 그는 본질적으로 작가는 아니다. 그는 말하기를 『모든 나의 책은 말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로마노 과르디니> 몬시뇰은 1885년 2월 17일 「베로나」에서 출생하였다. 전통있고 부유한 이태리 가문의 일가인 그의 부친은 외교계에서 활약하였다. 따라서 <과르디니> 몬시뇰은 한살 때에 「뮨헨」으로 이주하였고 후에 「마일쯔」로 옮겨 그는 그곳에서 자랐다. 「튜빈겐」대학에서 재학시 젊은 <가르디니>는 생물학(生物學)과 의학(醫學)에 몰두하였으나 점차로 그는 자기가 길을 잘못 들은 것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그는 곧 과학분야에 투신하였으나 드디어는 양친으로부터 「후라이부르그」에서의 신학 연구에 동의를 받게되었다.
1912년에 그는 신부로서 서품받았다.
1925년에 「베르린」의 「아렉산델 훔보르트」대학은 그를 위하여 특별시간을 마련하였고 제일 큰 강의실을 할당하였다. 일반사회 명사로부터 「루테란」 주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식인들이 <도스토에브스키>, <단떼>, <리르케>, <휠데르린> 및 「스코라」 철학에 관한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찬란한 업적은 그가 청년노동자와 농부 및 학생들을 위한 가톨릭 청년운동을 영도한 사실이다.
특히 그는 항상 전례(典禮)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미사때에는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먹을 것과 의복 수집을 직접하였다. 모든 독일지방으로부터 모여드는 수백, 수천이 청년들은 가톨릭 신앙을 여하히 회춘시키며 일상 생활에 여하이 밀접하게 관계시킬 것인가에 관하여 <과르디니> 몬시뇰과 토의하기 위하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