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유럽」의 聖美術(성미술)
完結美의 樣式들
발행일1961-10-01 [제297호, 4면]
지난 3월20일부터 7월31일까지 나는 국보유럽전시회(國寶유럽展示會)를 계기로 각국을 순방하면서 우리의 문화예술, 특히 공예미술을 소개선전하고 공예에 관한 비교연구와 관광시설을 시찰할 機會를 가졌었다. 이 4개월여에 걸친 유럽체재기간을 통하여 「유럽」 각지의 성지들과 성당들을 두루 찾아 참배하고 각종 성례식(聖禮式)과 행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는 다시 없이 귀중한 체험이었다. 특히 5월23일에는 교황 <요안> 23세를 교황청에서 알현하였는데, 이것은 나의 생애에 다시 없는 영광이었다.
알현실은 모두 17실이었다. 나는 제14실에서 알현하였다. 대합실의 눈부신 장식과 고대시종문무관(古代侍從文武官)들의 각가지 복장은 위엄이 넘쳐 흘렀다. 「유럽」 각지의 유명한 궁전들을 보았으나 그 훌륭함은 교황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남불의 「루르드」와 이태리의 「아씨시」-이 두 성지의 참배는 나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3월26일 「런던」의 「오라또리」 성당에서 성지주일을 지낸 나는 곧 비행기편으로 「로오마」로 향하였는데, 여기서는 안응열(安應烈)형(당시 註伊大使館參事官)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이날 저녁 나는 안형의 안내로 「베드루」 대성당을 가 보았다. 이미 눈에 익숙한 대성당과 광장, 그리고 광장에 마련된 분수와 「오벨리스크」를 볼 때의 나의 가슴에는 이루 형용하기 어려운 감격의 염(念)이 북바쳐 올랐다. 「오벨리스크」 앞에서 차를 세우고 내리면서 나는 한 손으로 성호를 긋고, 주모경, 영광경을 외면서 천주의 자손된 기쁨과 영광을 천주께 감사드렸다. 광장을 거닐고 「오벨리스크」를 만저보며, 그 높다랗게 큰 「돔」을 올려다 볼 그때의 충만한 환희와 감격은 다시 한 번 천주께 감사드리는 이외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운전수 <씨스또>군의 설명에 의하면 성당을 향해 오른편에 있는 건물의 맨 위층의 두 창에 불이 켜져있는데 그 한쪽은 교황성하 비서의 거실이고, 다른 한쪽은 교황성하의 침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저녁 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것이나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교황 성하의 강안하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설명대로 밤늦도록 환히 밝혀져 있는 두 창을 바라보며 천주께 감사드렸다. 제대만도 3백개소가 되는 이 웅장하고, 미술의 극치의 표현이라 할 「베드루」 대성당은 1506년 건축가 <브라만떼>가 교황 <니골라오> 5세의 명을 받들어 공사에 착수한 이래 전16세기를 통하여 <라파엘로> <산.갈로> <미껠란젤르> <비뇰라.델라.뽀르따> <마데르나> 등 당대 제일류의 건축가들이 이 대성당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미껠란젤로>는 1547년 공사에 참가하여 중앙의 「돔」에 건축의 미적효과와 구조적 기능을 집중하고, 부속물들을 단순화하여, 통일있는 힘찬 구상을 가지고서 그 실현에 착수하였다. 불행히도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의 노력은 「돔」의 설계에서 그쳤으나, 건립이 계속되어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찬탄을 받게된 것이다. 성당의 정면은 <마데르나>에 의한 것이며, 17세기 중엽에 <베르니니>가 전방의 광장에 아름다운 열주랑(列柱廊)을 더함으로써, 드디어 「베드루」대성당은 현재의 모습대로 완결되어, 전 그리스도교계 최대의 대성당으로서 그 웅자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명동(明洞)성당 일곱이 들어 앉을만한 것이니 규모의 웅대함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넓고 높은 공간을 빈틈없이 장식하고 있는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회화, 조각 「모자익」 등은 실로 『신성의 표현』 그대로이었다. <베드루> 종도의 동상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는데 그 발에 손을 대어 침구하는 열심한 교우들이 많아, 지금은 오른발의 발가락이 다 닳아 없어졌고, 왼발도 계속하여 닳아가는 중이었다. 후일 나는 다른 곳에서도 이와같은 동상을 많이 보았다. 「돔」 꼭대기에 올라가 「로오마」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다. 4월2일은 주일이어서 「베드루」대성당에서는 교황집전으로 미사의 식이 있었다. 세계 각 처에서 모여든 교우들로 내부에는 발들 곳이 없었고 교황성하의 강복을 받으려고 광장에는 30만 군중이 꽉 들어차 있었다. 「베드루」대성당의 웅장하고 신성한 자태는 참으로 성교회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로오마」에는 이밖에도 「바오로」대성당을 비롯하여 대소 6백 이상의 갖은 양식으로 된 성당이 있다.
「바티깐」 궁내의 「모자익」 대제작소(大製作所)에도 참관하였는데, 이곳의 출입에는 「카디날」의 사전 허약이 필요하였다. 전에는 재료로서 3천종의 색대리석(色大理石)이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합성기술(合成技術)의 발달로 무려 2만8천여 종의 색대리석이 사용된다고 한다. 공장 내에는 도서관의 서고(書庫)처럼 생긴 재료창고가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미껠란젤로>가 4년이 걸려 완성한 「씨스틴·채플」의 천정대벽화(天井大壁畵)는 다섯번이나 가 보았고 <지오또>의 대표작인 「아씨시」 「후레스꼬」 벽화와 「밀라노」의 「산따·마리아·델레·그라찌에」 수도원의 식당전면의 벽에 「후레스꼬」로 그린 유명한 『최후의 만찬』도 보았다. 두 달 동안 두루 다니면서 각 성지와 유명한 성당들이 있는 도시들을 찾아가 보았고 또 이들을 소개하는 각종 자료를 가지고 있으나, 紙面의 제한으로 모두 소개할 수 없음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 <방지거>와 성녀 <글라라>의 성지인 「아씨시」에 관하여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아침 일찌기 이 중세기의 도시에 도착하였는데, 3층으로 된 오상(五傷) <방지거> 성인의 성당이 한눈에 보였다. 이곳은 또한 <지오또>의 유명한 벽화가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성당 내외의 장식의 아름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제단, 제대, 색유리 등은 찬란하기만 하였다. 광장 아래서는 14일 때에 수많은 열심교우들이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고심 극기로 기구한다는 것이다. 「방지거」 수도원 안에는 성인께서 가시장미밭에서 나체로 딩굴며 고행을 하신 유서 깊은 10여 평쯤 되는 꽃밭이 있는데 이곳에서 자라는 장미에는 그 후로 가시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성인께서 양이 이리에게 물려가는 것을 구해주시고 『다시는 위험한 곳에 혼자 다니지 말라』고 일으신 것을 조각으로 옮겨놓은 것을 보았는데, 바로 나에게 하신 말씀처럼 느껴졌다. 성당 내에는 성인께서 오상을 받으신 십자가가 있었고, 고행하시던 토굴 속에는 모든 것이 그 위치 그 형상대로 있어 참으로 감개무량하였다.
이곳에서 약 2백「미터」쯤 언덕 아래로 긴 토벽을 끼고 내려오면 성녀 <글라라>의 수도원이 있다. 입구에서 나는 그 당시 성녀께서 10자가를 들어보이심으로서 만족(蠻族)의 침입으로부터 성지를 보호하신, 뜻깊은 2층의 창문을 보았다. 수도원 내에는 모든 것이 당시의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아래로 내려오면, 크고 아름다운 성당이 하나 보이는데, 이것은 7백여 년 전 오 주 예수께서 <방지거> 성인에게 『내 집이 문어져가니 수리하라』 하신 말씀 그대로 건립한 것으로서 「오라또리오」 성당을 중심으로 주위에 큰 성당이 세워져 있다. 지금도 매일 수백만명이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 제대에는 성녀 <글라라>의 시체가 봉안되어 있는데, 7백년이 넘도록 조금도 썩지 않고 곱게 합장하고 누어있는 기적을 보려고 온 세계에서 수없이 많은 참배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리고 성당 정면에는 금색의 성모상이 높다랗게 세워져있는데, 내가 갔을 때에는 때마침 햇볕을 받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성지 「루르드」에도 이에 못지았게 크고 아름다운 성당과 광장이 마련되어 있어, 참배자가 많다. 그런데 어디를 가나 성물을 취급하는 사무소와 상점이 많은데는 놀랐다. 「유럽」의 각 성지와 유명한 성당이 있는 곳에는 성물상점이 골목마다 꽉 들어차 있는데, 나에게는 진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새로 만든 각종 성물들을 빈틈없이 갖추고 있었다.
치명자들의 모습이 아로새겨진 각지의 「까따꼼브」는 그 구조가 깊고 길고 복잡하여, 안내자 없이는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다. 「까따꼼브」마다 치명자들의 무덤이 처처(處處)에 있어, 이곳에서 미사를 드리며, 뭇 성남성녀(聖男聖女)들의 피흘린 신앙과 노고를 추모하고 있다.
한편 「빠리」의 현대미술관에서는 「성미술전」(聖美術展)이 열리고 있었는데, 제대를 위시한 현대식 색유리, 「모자익」, 10자가, 성상, 성화, 성광(聖光), 제의, 제기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모두가 새 시대의 새로운 「디자인」으로 된 것이어서, 보기에도 즐거웠다. 우리들도 보다 큰 관심과 이해로서 성미술의 보호완성을 위해 노력하여야 하겠다. 「독일」과 「스위스」의 각 도시 그리고 「비엔나」를 중심으로 한 각지의 성당들은 실로 미술의 극치라 할만큼 웅장하고 완결되고 아름다우며, 갖은 양식으로 된 이 건축물들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오로지 건립(建立)을 위해 노력한 자취가 역역히 드러나 보였다. 「유럽」 문화 자체가 본래 가톨릭에 기초한 것이라 당연하기도 하겠으나, 가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들의 생활과 환경에 접할수록 나는 그들이 정녕 천주교회의 품안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번 유럽 각지의 성지와 유명한 성당들이 있는 도시를 순방하는 동안 천주의 자손된 것을 얼마나 감사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