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5) 금지된 마을 ①
미셀·까루우즈 原著
발행일1961-10-01 [제297호, 4면]
1883년 6월10일 아침 5시 <샤를르 드 후꼬오>는 「알제」의 유데아인 촌에 들어갔다. 아무도 그가 여기에서 떠나가는 것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말도세>의 집에서는 기묘한 변신(變身)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후꼬오>는 반은 「시리아」풍이며 반은 「알제리아」풍의 유데아인의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그가 입고 있던 유럽풍의 의복은 버서버렸다. 새로 가라입은 옷은 소매가 풍만한 상의, 무릎까지 닿는 스봉, 색갈이 짙은 나사로 만든 토이기풍의 지레, 두건과 커다란 소매가 달려있는 모직으로 된 로오브, 새빨간 둥근 모자와 깜장 비단으로 된 다아방 등이었다. 이것은 도화사를 위한 가장은 아니다.
이 여행에는 영구히 돌아오지 못할는지도 모르는 위험이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광적으로 유데아인 배척주의자인 <모레스> 후작까지도 만일 이러한 모양을 한 그의 친구를 보았더라면 <호오머> 풍의 웃음을 웃었을 것이다.
그후부터 「후꼬오」는 유데아교 제관(祭官) <죠셉 알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분장과 위명(僞名)은 <말도세>의 최후적인 생각이었다. 물론 유럽풍의 복장은 불간긍하다. <후꼬오>는 모록코에 들어가기조차 못했을 것이다. 회교도의 복장은 위험한 것이었다. 이 새로운 탐험가는 아주 초보자이며 그의 서툴은 아라비아어와 회교에 관한 무지 때문에 얼마 안 가서 스스로 폭로함에 틀림없다. 유데아인으로 가장한 <후꼬오>는 다른 유데아인들 속에서는 <말도세>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받을 것이며 회교도들은 그에게 주목하는 것조차 경멸할 것이다.
유데아인 자신들이 <후꼬오>의 이상한 거동에 의하여 호기심을 끌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말도세>는 그가 러시아에서 최후의 유데아인 학살로 쫓겨나온 모스코인의 제관으로 통하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다같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정처없이 경건한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짐은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없으면 안될 중요한 필수품이 들어있었다. 커다란 주머니 속에는 한 장의 담요와 각각 가라입을 옷과 약간의 돈과 부엌제구가 들어있었다. 그외에 금속제로 된 상자를 두개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구급용의 여러 가지 약이 들어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그다지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 즉 탐험자의 병기고(兵器庫) 육분의(六分儀), 나침판, 한란계, 청우계, 지도가 들어 있었다. 이 모스코인은 최후로 금과 산호 모양으로 3천 프랑을 옷속에 숨겨 두었다. 이와같이 장신구를 가진 두 사람의 여행자는 「홀랜드」행의 기차에 탓다.
「홀랜드」에 밤늦게 다달은 그들은 유데아인의 여인숙에 들었다. <후꼬오>는 토민들과 함께 삼등으로 여행하며 가장하기 위하여 서투른 프랑스말로 얘기했다. 그러나 그가 여인숙에 들었을 때 그 하인들이 그를 딴 나그네들과 마찬가지로 『너』라고 해라를 할 때는 약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날은 하는 수없이 쉬게 되었다. 왜냐하면 마침 그날은 「펜레코스테」 안식일(安息日)이였기 때문이었다. 신망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나 <모이세>가 「시나이」산에서 천주십계(天主十誡)가 기록된 율법의 석판(石板)을 받은 기념일에 노동이나 여행을 하는 법이 아니었다. <후꼬오>는 종일 방안에 파묻혀 있었다.
『<말도세>는 유데아인들과 집회소에 갔다가 밤늦게 같은 교도 한 사람과 돌아왔다. 그들은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내 친구가 모든 것을 황금으로 환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는 선석(仙石)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과 또 한 사람의 유데아인은 연금술사(鍊金術師)의 보호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촛불에 흐미하게 빛이는 그들의 그림자가 벽에 커다란 실엣트를 그렸다. 나는 얘기하고 있는 그들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이상한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짚우래기로 만든 요위에서 잠들었다.』
일요일 오후에 두 사람의 제관은 「틀렘센」에 도착했다. 모록코는 멀지 않았다. 길을 안내받기 위해서 북 「알제리아」 국경에 접해 있는 모록코 영토인 「리프」산(山)에 살고 있는 유데아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재관은 다음날 오전 중 찾아 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점심때쯤 되어 두사람은 빵과 감람나무 열매를 사가지고 「틀렘센」의 광장에서 흙바닥에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마침 그때 「아프리카」의 엽기병(獵騎兵) 일대가 말을 타고 지나갔다. 그들은 배부분이 <후꼬오>를 아는 사람들이었으나 눈앞에 그를 보면서도 그가 <후꼬오>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중의 한사람이 저기 쪼그리고 앉아서 감람나무 열매를 먹고 있는 유데아인은 원숭이와 꼭 같다고 조롱했다.』고 <드스공삭크> 대위는 말하고 있다.
그날밤 두 사람의 나그네는 십여 명의 수염이 허연 유데아인 늙은이들 사이에 끼어 흙바닥에 앉아서 촛불 밑에서 다만 한 개의 술잔으로 차례를 회향주(회香酒)를 마시면서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잡담을 하고 있었다. <말도세>는 자기의 모험담을 섞어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자기 친구 「모스코인」을 위하여 꾸며낸 지난날의 얘기를 멋있게 늘어놓고 있었다. 결국 그들은 「랄라마르니아」까지 계속하여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은 그 이튿날 일찌기 출발하면 저녁때 6시경에는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후꼬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들은 밤에는 유데아교의 집회소에 머물렀다. 그것은 모록코에서 내가 보게될 모든 유데아신전(神展)과 같은 형식이었다. 그 건물은 장방형이며 중앙에는 일종의 독서대(讀書台)가 놓여 있었으며 벽에는 선반이 있다. 독서대는 일주일에 두 번씩 낭독하는 율법서(律法書)를 올려놓는데 사용되는 것이다. 부유한 교단(敎團)에 있어서는 이 독서대가 단 위에 있으며 때로는 뚜껑까지 붙어있다. 그러나 가난한 촌에서는 말뚝 위에다 판대기 하나를 얹어서 만든 것이었다. 선반에는 한 권 혹은 여러 권의 율법서를 넣어둔다. 그 책은 양피지에 쓴 것이며 나무원통에 말려있다.(이것은 마치 「로오마」 시대의 서적과 같은 것이나 다만 한 개의 원통 대신에 두 개의 원통에다 말았다는 점만이 다르다) 이중으로 말린 이 책은 높이가 50센치이며, 대단히 비싼 천으로 겹쳐서 만든 덥개로 이중 삼중으로 덮여있다. 유데아 집회소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며 벽에 기대서 의자가 빙둘러 놓여 있어서 그것으로 내부는 가득찬다. 우리가 마침 거기서 식사를 끝냈을 때 3,4십명의 사람들이 차례차례 들어왔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서 낮은소리로 얘기를 했다. 그들은 저녁기도를 하기 위해서 모여든 그 근방의 「이스라엘」인들이었다. 그들은 신호에 따라 일어서서 동쪽을 향하여 낮은 소리로 기도를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그들이 하는대로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의 흉내를 내면서 마치 강의(講義)를 암송하는 학생과 같이 혹은 소리없이 혹은 그들의 코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7,8분이 지난 뒤에 그들은 최경례를 했다. 그것이 끝이었다』
6월15일 이 두 사람의 나그네는 알제리아의 최후의 항구인 「누무르」에 도착했다. 여전히 <말도세>는 꾸며서 얘기를 하면서 현금을 구걸했으므로 <후꼬오>는 참다 못해서 가만히 좀 있으라고 할 정도였다. 한편 그곳의 유데아인들은 말하기를 「리프」산에 가려면 권력이 있는 모록코장노(長老)의 상당히 고가한 보호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장노는 반달 혹은 한달 혹은 그이상 기다리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 뜻하지 않던 최초의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뿐이 아니었다. <후꼬오>는 이렇게 썼다.
『나는 <말도세>에 대하여 대단히 만족하고 있다. 그는 하나의 결점밖에는 없다. 그것은 지나친 조심성이다. 확실히 그는 충동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그를 충동하겠다. 실제로 그가 완만을 좋아하는 것은 무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신체가 참으로 불쌍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의 완전한 장님이었으며 귀가 어두었다. 게다가 걸음도 겨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