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깊은 밤 갈멜회의 한 수녀가 성당에서 기구에 열중하고 있었ㄷ. 마음의 갈등을 정리해보겠다고 침착하게 두 손을 모우는 기구중에는 이상하게도 걷잡을 수 없이 분심이 새익고 이를 박차고 집념(執念)하려고 애쓰는 수녀에게 거의 육성(肉聲)에 가까운 어떤 환상의 권유가 들렸다. 『나는 죽은 성인의 한 유혼(幽魂)이다』 『나는 젊었을 때 조심성 없이 해태중에서 육신이 원하는대로 다 해보았다. 그러나 나이들어 죽음이 가까이 옴을 육감(肉感)했을 때는 젊은 날의 죄를 통찰하고 죽음에 대비키 위해 보속을 시작했다. 죄를 진절히 통회한 덕분으로 지금은 천상의 영화를 누리고 있다. 너는 아직도 젊다. 몸에 곰팡이가 쓸도록 너를 가두고 편태하는 것은 예수의 사랑에 어긋나는 자학이 아닐까? 나처럼 현명하게 처신하기를 권하기 위하여 너를 찾는 것이다. 수도복을 벗고 세상을 향락해라. 죽음의 시간이 가까이 온 줄로 생각할 때에 보속의 생활을 시작하면 된다. 천주는 인자하셔서 사람의 죄를 기꺼이 사항 주시는 분이시다. 통회하고 보속한 후 네가 죽으면 천주는 너를 천당으로 데리고 가 천신들과 나처럼 한때 죄인이었으되 지금은 성인이 된 자들과 한자리 하여 그의 무궁한 영탁영복에 참여케 하시는 것이다. 그의 자비에 매달려라. 그의 자비를 선용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유혹은 감미롭고 이치에 닿는 것 같아 수녀는 일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는 냉철한 정신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조용한 예수의 고상을 보았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는 생각지도 못했던 힘찬 어조로 유혼을 쫓았다. 떡과 명예와 영화를 걸어 예수를 시험하던 사탄의 간교를 이기시던 예수님의 침정한 표정이 이 연약한 수녀를 도왔던 것이다.
사탄은 자기 본연의 흉칙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신기하고 매력적인가 하면 범절있고 점잖은 신사로서 나타난다. 순진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또는 인정있는 구원자로, 우리의 권리와 쾌락과 행복의 영도자로 우리를 끌어보는 것이다. 만약 사탄이 그의 본 형상대로 삼엄한 분위기에 흉칙하고 간악하고 요사스런 독기(毒氣)를 띄고 다가온다면 금시 그를 경계하고 쫓아내리고 또 방비할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간교하다. 오늘 성경에도 사탄은 곱게 분장(扮裝)하여 예수께 다가온 것이다. 예수께서 시장하실 때 나타나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라고 종용했으니, 얼른 봐선 타당한 제시요 조력이며 동정이었으나 속심으로 대재를 지키는 예수를 유감키 위한 감교였음은 뻔한 일이다.
멀리 소급해서 우리의 옛 원조 <아담>과 <에와>에게도 유혹은 부당한 금지구역으로부터 그들을 석방시켜주겠다는 우의(友誼)의 빛으로 나타난 것이다. 선악의 분별을 지각시켜주려 했으며, 먹음직한 금단의 과(果)를 제시하여 유인해온 것이다. 젊은이에게 다가와선 마음을 흔들고 주물러 본다. 『천주께서 너에게 육신과 함께 육욕을 주신 것이 아니냐! 그것을 주실 때는 네 임의대로 그것을 쓰라고 주신 것 실컷 쓰고 탐익해라. 그 감미를 고의로 참는다는 너의 어리석음은? 결코 그것은 죄 되는 것이 아니고 너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그것은 발랄한 현대인의 자기표현뿐이지 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젊은 신심을 뿌리채 흔들어넘기기 위해 사탄은 친구처럼 선배처럼 타협을 그럴사하게 모의해온다. 때로는 대학교수로, 이름난 과학자로, 그리고 저명한 작자로 분장하여 제법 멋지게 진리를 찢어날리기에 힘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성 <바오로> 종도는 진정한 신앙과 조덕율을 파괴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대비하여 「도린도」 신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이미 사탄의 가면을 설명하셨다. 『사탄은 그 자신 언제나 천사의 및으로 몸을 단장하고 다닌다』라고 그의 위장을 폭로하신 바 있다. 시차와 쾌락은 사랑의 극치요 남의 것을 훔친다는 것은 응당 자기게 속해야 할 것을 가지는 것이며, 오만은 천부(天賦)의 권한을 주장행사하는 것이며 남을 의심하는 것은 머리를 써 이것 저것 궁리해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럴법한 사탄의 감언이설은 불만과 욕정에 허덕이는 세상에선 가끔 환영을 받는다.
다행히 사탄의 위장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어떤 사실을 두고 어떻게 진부(眞否)를 판정해야 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변함과 오류 없는 가톨릭교리를 신앙하는 사람에게는 외려 간단한 사실인지도 모른다. 가톨릭 교리와 가톨릭의 도덕율에 기준하여 그 역(逆)을 역설하거나 가톨릭의 가르침이 오류라는 것을 믿고록 권유한다면 그것은 그의 지론이 아무리 유창하고 근사할지라도 변장한 사탄의 유감으로 믿어도 좋은 것이다. 따라서 교리를 많이 알수록 거짓선지자의 위장을 벗기기가 쉬운 것이다. 또하나 다른 방법은 규칙적으로 꾸준히 정성을 모아 기구하는 시간을 갖는 일이다.
『엎대어 구하오니 성 <미가엘> 대천신이여 이세상 전장에 우리를 보호하사 마귀의 악함과 흉계를 방비케 하시고……』 이러헥 열절히 기구할 때에 사탄의 기만을 꿰뚫어 『사탄아, 물러가라』 힘있게 호령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멘.
李鍾淳 神父(서울 明洞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