卞熙瑢(변희용) 朴順天(박순천) 夫妻(부처) 改宗(개종)
改宗後(개종후) 이런 것이 생각난다고
例外(예외)없이 느끼는 謹嚴(근엄)이 感化(감화)
80里(리) 가마타고 미사 참여한 祖母(조모)님
발행일1962-03-11 [제318호, 3면]
【서울】 지난 2월 27일 하오2시에 박(朴順天) 여사와 그의 부군 변(卞熙瑢) 교수, 두분이 아현동성당에서 동 본당 <요왕> 장(張丙龍) 신부 집례로 각각 <요안나>, <바오로>의 본명으로 성세를 받았다.
이날 이 두분을 축복하기 위하여 <마두> 윤(尹亨重) 신부를 미롯하여 <요안> 장(張勉) 박사 부처, 전 국무원 사무처장 정(鄭憲柱)씨 등이 참석하였다.
특히 변교수의 대부인 서울 명동 총회장 <요안> 조(曺元煥)씨는 작년 10월부터 두분을 꾸준히 개인지도 하였었다.
다음은 변씨내외의 개종까지의 이야기이다.
전 민주당 최고이원이며 여성정치지도자로 그 이름이 쟁쟁하던 박(朴順天) 겨사 및 부군 변(卞熙榕)씨가 영세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 자택을 방문하였다.
시내 신촌종점에서 노고산 방향으로 1마장 반 가량 가다가 조용한 교외에 자리잡은 아담한 양옥집이 있다.
아직 조반전이라 좀 죄송하였지만 부득불 들이닥칠 수 밖에……
두분은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초면인 기자에게 아주 친절히 대해준다.
항상 멀리서 존함만 듣던 분인데도 구면인듯 어색하지가 않다. 아마도 사람을 이끄는 무슨 마력을 가진 것 같다.
퍽 겸손하셔서 여쭐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박여사께서는 기자의 심정을 꿰뚫어 보는지 차근 차근 영세준비까지의 심정을 『어릴때부터 집안이 모두 기독교신자(장로교)였기 때문에 쭉 교회에 다녔지요. 그후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느라, 또 기미년 3·1운동의 크나큰 물결에 휩싸여 종교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읍니다.
그런데 해방직전, 그러니까 중앙여자중학교를 설립하고 부교장으로 있을 때, 불이 나서 1년간 명동성당 내의 문화관을 빌린 적이 있읍니다.
그때 좀 복잡한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면 성당 지하실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를 올리거나 어떤때는 실컷 울기도 했지요. 왠지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며 이 곳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을 수 있었읍니다.
그러다보니 차차 주일미사에도 나가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가톨릭에 대해서 아는 것은 전혀 없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앟았지요.
기독교 예배시에는 항상 자신의 고요를 깨뜨리곤 하였으나 여기서는 엄숙하고 근엄한 분위기 속에 자기도 모르게 휩싸여 자기 심정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좋았읍니다. 이런 것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고 있었으나 항상 아시다시피 바쁜 생활에 쫓기어 한가한 여가를 얻을 수 없고 시간이 없었지요. 그러나 항상 무언지 모르나 늘 고독하며 울고싶은 심정 속에 있었는데 3·4년전부터는 가톨릭에 뜻을 두어 바쁜 가운데에도 시간을 내어 <마두> 윤(尹亨重) 신부님이 강의하시는 교리강좌를 들어왔고, 주일미사에 가끔 참석하였읍니다.』
한편 부군이신 변 선생님도 『어릴 때 조모께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근엄하며 늘 신공을 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아왔었읍니다. 일요일엔 대구에서 80리나 떠어진 「고령」에서 대구까지 꼭 가마를 타고 가셨는데 이것이 어릴 때의 종교에 대한 인상이었읍니다.
그후 일본에 유학하여, 거기서 한국인 유학생 이사가 되었는데 그 당시 유학생 간부들은 자동적으로 연합회 감리교에 입교하여야만 되었읍니다. 그러나 기미년 독입운동에 실패하고 난 다음부터는, 그때는 사상전환기가 되어 종교와 거리가 멀어져 갔지요.
또다시 독립운동 준비에 주력하여 그때는 일본 노동자, 사회주의자와 자연히 친하게 지내왔고 그후 구향인 고령에서 10년간 은퇴생활을 하다가 대동아전쟁때, 신사참배를 피하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지요.
그런데 교시찰인이라 감시를 받게되어 9년간을 광산에서 지내다 해방직후 한국 민주당을 조직하고 그후 오늘까지 성균관대학에서 교수하고 있었읍니다.
하여간 나의 굴곡 많은 생애중 종교란 한때 감리교를 믿는 것 뿐인데 어쩐지 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면 곧 가톨릭에 대한 것이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현재 6남매중 3남인 <방지거> 변(卞俊晧)씨는 2년전 군복무중 영세입교하였다. 이 두분은 작년 10월초부터 본격적으로 교리공부에 열중하였다.
변시 내외분을 지도한 명동 총회장 <요안> 조(曺元煥) 회장은 매주 화요일마다 문답찰고를 받았다. 대부·대모는 <요안> 조(曺元煥) 회장과 <말따> 오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