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24) 나자렏이라 하는 極地(극지) ①
발행일1962-03-11 [제318호, 4면]
한 척의 배는 아시아를 떠났다. 성심의 성모수도원의 전에 원장으로 있던 <동 루이 드곤자크> 신부가 <스타우에리>의 원장으로서 따뜻하게 옛날의 수련자를 맞아 주었으며 총장으로 부터는 최초의 명령을 전해주었다.
그것은 최후의 실연으로서 <알베리크> 수사는 2년간 로마에서 신학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령이었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유브랑> 신부에게 써서 보냈다.
『당신도 나의 숙망이 결코 변하지도 않고 전보다 견고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오랜 시련을 지나 다만 하나의 숙망밖에 가지지 않는 우리 모든 이에게 있어서 천주의 성소가 확실히 제시되리라는 것을 믿으면서 단순하게 깊이 감사하면서 보종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숙망이라는 것은 천주의 성소가 어떠한 것이던 그것을 행하기 위하여 그것을 알고 또 전심전력 기울여서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10월 30일에 그는 로마로 향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를 떠났다. 로마에서 그는 「생 장 드 시이토」 회의 총본부 수도원에 숙소를 두었다. 그는 이 새로운 로마 체류를, 성베드루의 도시의 위대한 성지순례를 하는데 이용했다. 그는 「그레고리아」대학에 출석하기 시작하였다.
1897년 2월 2일에는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자로서 최초의 서원을 세원 이래로 5개년이 되는 날이다.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회헌에 따라 회를 떠나든가 종신허원을 하든가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월에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총장 <동세바스티앵>이 이 문제를 끄집어 내었다. 그는 그것에 대하여 평의회를 열고 즉시로 최후적인 결정을 하였다. 그에 따라 시련과 신학 연구의 2년은 제거되었다.
<알베리크> 수사는 자유로 출발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양심의 지도신부인 <유브랑> 신부의 조언을 들으라는 권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비천하게 된다는 것이 나의 천직이라고 나는 믿는다. 가대수도자(歌隊修道者)가 되는 것을 버리고 수도원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하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기 위한 모든 문이 나에게 열려져 있다.』고 그때 그는 기록하였다. 그달 말에 그는 <유브랑> 신부는 <알베리크> 수사에게 다시 회측을 만들거나 사람을 모으지 말라고 요청하고 있으나 그는 <알베리크> 수사가 자기가 원하는 빈곤과 무명 중에 어떤 수도원의 한 구석에서 지내는 것은 허락하고 있다. 2월이 되자 <샤르르 드 후꼬오>는 로마를 떠나 또다시 아시아를 향했다.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이 그에게 여비를 주었다. 그가 이제 부터 나자렏의 그리스도의 생애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곳은 참으로 나자렏에 있어서이다.
1897년 2월 24일 <샤르르>는 쟈바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38세였다. 그는 자기에게는 과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트라피스트 수도복을 벗었다. 그것은 전에 창기병의 제복이나 야회복을 벗어버리는 것과 꼭 같은 것이었다. 그는 타아방식의 하얀 본넷트 청백의 줄친 무늬가 있는 모자 달린 긴 옷저고리에 청색의 면직으로 된 바지 그리고 싼달을 시었다.
전에 그는 탐험가로서의 정열에서 맨발로 걸어다니는 유대아인 제관이 복장을 해본 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는 분장이 아니라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하려고 원한 파레스티나식 복장을 입은 것이었다. 그는 완전히 동양의 걸인과 같은 모양이었다. 다만 그를 걸인과 분멸할 수 있는 유일한 표는 허리에 단 커다란 로사리오였다.
그는 이미 수도회의 으뜸이며 여러 수도원의 창립자였던 <성 벨라도나> <랑제> 신부의 제자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귀부인과 같은 빈곤을 찾아내려고 여행을 한 앗시지의 <성프랑치스꼬>나 누데기를 감고 방랑자로서 <루이> 15세와 저 계몽철학자의 시대에 이(風)를 유일한 길동무로 삼고 방황한 <성 베네딕트 라부르>와 흡사했다.
그의 이름은 변했다. 이제는 <후꼬오> 백작도 <알베리크> 수사도 아니다. 그는 단순히 <예수의 샤르르 형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수도명이라는 헛된 문제는 아니라 이것은 그가 커다란 수도회에 속하는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본명과 그리고 그리스도에 속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였다. 그는 그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는 그는 고독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가 전과 다름없이 수사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에서는 그는 결코 고독하지는 않다. 그리스도의 가장 비천한 하인이 될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인간의 형제가 되고 비참한 자들과 같이 되기 위하여 그는 가족적이며 애국적인 오만 혹은 교회적인 오만까지도 이탈하였던 것이다.
성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도보로 배틀레헴과 예루살렘에 순례하기 위하여 남하하였다가 그곳에서 다시 나자렏을 향하여 북진했다. 8일간 그는 도보로 2백키로메타를 갔다. 먼지 투성이 누더기 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헤치고 피투성이가 된 발을 하고 그는 단식과 피로에 지쳐 그리스도의 마을에 들어갔다. 그는 미칠듯한 기쁨에 넘쳐있었다.
그는 약간의 일을 하고 수도원의 문앞에서 살기를 원하는 방랑자로서 「카사 누아」(새로운 집)의 프란치스꼬회의 수도자들이 있는 곳을 찾았다. 자기의 신분을 감추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들어가기 전에 나자렏에 와서 머물렀을 때 전혀 다른 복장을 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고 한 제의방의 수도자에게 그의 신분이 발각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중의 한 사람인 크라라회 수도원을 맡은 신부가 크라라회 수녀들에게 맞나리 가라고 그에게 충고했다. 그들은 반드시 그가 원하고 있는 사소한 일거리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다음날인 3월 6일은 마침 13세기에 성녀 <크라라>와 <성 프란치스꼬>에 의해 창립된 크라라회를 15세기에 개혁한 성녀 <코렛트> 첨례였다.
<샤르르> 수사는 즉시 크라라회의 수도원으로 가서 성당에서 기구를 올렸다. 그는 그런줄 몰랐으나 접수계에 있는 수녀는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걸인과 같은 비참한 모습을 보고 수녀는 신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뒤이어 또 한사람의 접수계의 <말다< 수녀는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수녀는 속으로 이러한 사람이 프랑스어를 사투리 하나 없이 하는 것을 듣고 놀랐다. 그는 석회로 바른 흰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다만 한개의 테블과 몇개의 의자밖에 없었다. 그의 앞에는 일종의 비밀창이 있었다. 그것은 응접실의 철창이었으며 그뒤에는 결코 여는 일이 없는 검은 포장이 느러져 있었다. 이 방문객은 기다리는 동안에 한개의 십자가상 주위에 걸린 현판을 바라본다.
『다만 천주뿐. 천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끊고 천주의 품안에 나는 모든 것을 찾아내었다. 천주를 사랑하며 천주께 바치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
돌연히 철망의 저쪽에서 발소리가 들여왔다.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가 있어지이다.』
이렇게 조용한 여자의 음성이 났다. 그것은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울타리 저쪽에서 걸어온 수도원장이었다. <샤르르> 수사는 말을 꾸미지 않았다. 그는 아주 거치른 말을 써서 일이 있나 없나를 물었다. 품값은 필요없고 다만 빵과 물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기구하기 위하여 약간의 자유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정직하고 소바한 정신을 가진 사나이라고 하는 것을 믿기에 의심이 될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수도원장은 성물을 맡아보는 이을 하며 이것 저것 잔신부름이라던가 손끝으로 하는 일을 할 남자 함사람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샤르르>가 바라고 있던 것과 꼭 들어맞았다. 그는 정원사의 집을 알선해주는 것을 거절했다. 마치 감시하는 방만하고 쓸데없는 물건을 정리하는데 사용되고 있는 마당 저편 구석에 있는 집을 그는 택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곧 일을 시작했다. 우선 그 판자집 속에 가득차 있던 것을 꺼내 버렸다. 접수소에 있는 한 수녀가 작은 테불 의자 그리고 짚으로 된 이불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이 손님은 즉시 짚이불을 구석으로 걷어치우고 말았다. 벤취위에서 잔다는 것이었다. 이 집의 단 하나의 사치는 이 극기를 하는 새 사람이 오두막집을 은수자의 암자로 높였으며 그것은 『끊임없는 도우심의 성모』에게 바쳤다고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