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사마리아」를 나와서 당신이 첫 기적을 행하신 「가나」촌(村)에 가신다. 거기서 예수님 앞에 한 대신이 나타난다. 이 대신의 집은 「가파르나움」에 있었는데 자기 아들이 거기서 병이 들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소문이 그의 귀에까지 전해졌다. 예수께서 「갈릴레아」로 돌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먼 길을 걸어 예수 앞에 와서 아들을 낫게하여 달라고 간청한다.
그는 「가나」의 기적가의 능력을 믿고 있었는 것 같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을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힘이 멀리서라도 그의 아들을 낫게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믿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너희가 만일 영적과 기묘한 일을 보지 아니면 믿지 아니하는도다』하신 예수님의 책망은 비통하다. 예수께서는 외적 표적에만 기인하는 신앙이 당신 말씀을 받아들임으로 더 확실한 신앙이 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희망하는 그 일에 대한 굳은 신념이며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굳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대신은 무엇이든지 할 결심이다. 그 순간에도 사경에 있는 아들에게 대한 불안으로 예수님을 독촉한다. 『주여 내 아들이 죽기 전에 내려오시옵소서』 이 열열한 기원에 예수님은 위로에 넘치는 말씀을 주신다. 『돌아가라. 네 아들이 살았나니라』 그는 아무 주저 없이 또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 도중에 종들을 맞난다. 좋은 소식을 전하려 일부러 온 것이다. 그 아들이 살았다고, 전날 일곱시에 학질이 떨어졌다고, 이 기적의 결과로 일어나고자 하는 대신의 신앙이 강해졌다.
열렬한 신앙 혹은 확신 이상으로 전염적인 것이 없다. 「사마리아」의 여인의 경우와도 같이 대신의 신앙은 기름의 불처럼 퍼졌다. 그와 함께 원가족도 믿었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할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대신의 예수님을 믿었고 그의 왼집안도 신앙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신앙의 실천에 있다. 누구든지 그러하겠지만 세례를 받을 때는 신앙의 감격에 타서 어떠한 곤란이 있더라도 결코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이 감격은 모닥불 같은 것으로서 인간의 약점에서 부지 중에 사라지던가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 신자라면 모두 착하고 친절해야만 할 것이다. 기대하였으나 그것이 어긋나서 신자 사이의 결점만이 눈에 띄게 된다. 자기가 영세한 성당 같으면 또 몰라도 멀리 이사를 해서 지금까지 본 일도 없는 성당에 가는 경우 자기를 아는 신자는 없고 교회 당국도 그토록 친절히 대하지 아니하면 신앙에도 동요를 느끼게 된다. 왼가족이 신자가 아닌 경우엔 자칫하면 신자가 그런 짓을 하느냐 하는 비판을 받게된다. 세속적 사교 때문에 신앙에서 멀어질 수 있고 세상 부귀를 쌓고 명예나 자유를 얻기 위해 신앙을 버린다. 신앙이란 옷처럼 입고 벗는 것이 아니다. 장속에 간직해 두는 것도 아니다. 신앙은 몸에 짖어있어야 하고 영혼 속에 깊숙히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영혼 속에 붙어 있어 우리의 사언행위를 다스리기 때문에 그것을 신앙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드라도 훌륭한 신자로서의 신앙의 길을 걷고 가야 한다. 좋은 땅에 뿌린 씨는 결실하여 백배 육십배 삼십배를 거두듯 우리의 마음 속에 좋은 지반을 만들어야 한다. 신앙을 버리는 중요한 원인은 교만 종교의 우태만, 세속명예 부귀, 탐욕 부량서적독서 악영화 관람 그리고 신앙의 자유를 주지 아니하는 자와의 결혼 등이다.
지혜로운 자는 집을 지을 때 만일의 경우를 고려해서 특히 기초 공사에 유의한다. 사랑에서 작용하는 신앙과 생활한 신앙이 있으면 된다. 그렇지 아니면 그 신앙은 죽는 것이다. 그것은 모래 위에 진 집과 같다. 감정은 좋은 것이나 그러나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아니된다. 어디까지나 천주님을 뿌리로 하는 확실하고 견고하고 생활한 신앙이라야 한다. 육신이 영혼 없이는 죽은 것인 것과 같이 선행이 없이는 신앙이 또한 죽은 것이다. <야고버> 종도는 말씀하신다. (2의206)
신앙을 단순한 감정으로 보는 눈은 그릇된 눈이다.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끝으로 잊어서는 아니되는 것은 신앙은 천주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자기 힘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 신앙은 천주님이 이를 주시하고 걷어가실 수 있는 귀한 것이나 그러나 질그릇에 담은 보배이다. 물론 천주는 이유 없이 주신 것을 빼앗아 가지는 아니신다. 그러므로 『주여 나는 당신을 믿나이다. 그러나 나의 약한 신앙을 도와주소서』가 우리의 기구가 되어야 한다. <바오로> 종도도 『오히려 내 육신을 편태하여 내게 복종시키나니 이는 남에게는 설교하고도 내 자신은 버림을 당할가 두림이로다』(고린토 전서 9장27절) 하셨다.
申相祚 神父(大邱曉星女中校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