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 23世(세)의 敎會統一(교회통일) 展望(전망) (上)
발행일1961-10-08 [제298호, 4면]
1. 제2차 바티깐大公議會 소집
1959년 1월25일 당일은 성 <바오로> 종도의 귀화축일(歸化祝日)이었기 때문에 「로오마」시 「오스띠아」가에 있는 성 바오로 대성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수많은 순례자들이 뒤끓고 있었다. 이날 현 교황 <요안> 23세께서도 성 <바오로> 종도 무덤에 참배하러 가셨다가 그곳에 모여온 신자들에게 강론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때에 교황께서는 제21차 대공의회(大公議會)를 조속한 시일 내에 소집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때는 현 교황 <요안> 23세께서 교황위에 등극하신지 불과 3개월밖에 안 되던 시기인데 저는 특히 그리스도교 재일치와 그 외 가톨릭교회의 긴급한 여러 가지 문제 해결을 위하여 과거 2천년 교회 역사상에 있어 20차밖에 없었던 대공의회를 소집하시겠다고 공고하셨기 때문에 전세계 가톨릭신자들은 깜짝 놀랬고 또한 비가톨릭신자들의 눈동자는 「로오마」로 쏠리게 되었다.
특히 이번에 소집되는 대공의회의 중요한 안건 중에 하나가 그리스도교회 재일치 문제라는데서 가톨릭신자뿐 아니라 다른 교파와 나아가서 전세계인의 관심꺼리가 되고 있다.
이번에 열리는 대공의회는 지금으로부터 92년 전에 열렸던 제1차 「바티깐」 궁전에서 개최되는 공의회라고 해서 제2「바티깐」공의회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제2「바티깐」공의회가 언제 시작되리라고 일자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대개 1962년 가을(9·10월경)을 목표로 제반준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그리스도교 再一致의 필요성
왜 그리스도를 믿는 제교회는 반드시 하나로 뭉쳐야 하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의 사상가(思想家)나 혹 철학가가 아니라 천주 성부께서 천국 안내자로 이 세상에 보내신 <메씨아>(救世主)이시기에 그가 가르친 영원생명에로 인도하는 길과 진리도 다만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자기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를 『나는 <다만 하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성부께 나오지 못하느니라』(요왕 14장 6) 하셨다.
사실 죄 중에서 헤매는 인류에게 구속의 은혜를 마련하여 주려고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가 다만 한 분밖에 없는데 어떻게 구원의 길이 되는 교회가 여럿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 <바오로>는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오고 또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그리스도)으로 인하여 의화(義化)가 세상에 왔다』(로마서 5장 12)
다시 성 <바오로>는 교회가 여럿이 아니고 다만 하나밖에 없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씀하시기를 천주님이 다만 한 분밖에 없듯이 신앙도 다만 하나요 거행하는 예식도 다만 하나밖에 없다고 하셨다. 『한 주시요 한 신앙이며, 한 성세가 있을 뿐이라』(에페소서 4장 3). 그러기 때문에 성 <바오로>는 교회 내부에 있어 분열을 엄금하시고 화목과 일치를 극력 신자들에게 역설하셨다. 『너희는 다 합심하여 말하며 너희 중에 분열이 있게 하지 말고 오직 한 정신과 한 의견에 온전히 일치할 지니라』(고린토 전서 1장 10).
위와같이 교회론의 박사이며 또한 교회 통일론의 제1선도자였던 성 <바오로> 종도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람의 몸에 비하여 설명하셨다. 『대저 우리는 한몸에 많은 지체(肢體)가 있으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든 이는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니 각각 서로 지체가 되느니라』(로마서 12장 4~5).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각 개인으로는) 그 지체 중에 하나이니라』(고린토전서 12장 27). 성 <바오로> 종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神秘體)이란 그가 다른 곳에서 증언하듯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저(=그리스도)는 그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골로새서 1장 18). 마치 사람 하나에게 한 몸밖에 없듯 이 한 그리스도께도 한 몸(=神秘體)밖에 없으며,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도 절대로 여럿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성 <바오로> 종도는 당시 「고린토」 신자들의 분열 행위를 다음과 같이 크게 책망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는 제각기 이르기를 「나는 <바오로>를 따르노라」 「나는 <아폴로>를 따르노라」 「나는 <케파>를 따르노라」 「나는 그리스도를 따르노라」하는 도다. 그러면 그리스도 분열되셨단 말이냐? 혹 <바오로>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혹은 너희가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를 받았느냐?』(고린토 전서 1장 12-14). 만일 성 <바오로> 종도가 현세기에 나타나셔서 다시 말씀하실 기회를 가지신다면 기필 위와 같은 책망의 어조로 현 그리스도교계를 나무라실 것이 틀림없다.
『너희들이 지금 수백가지 교파로 분열되어 서로 갈등하고 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교리이며 교회냐? 내가 전에 「고린토」 신자들에게 책망한 말을 너희는 못 들었느냐? 너희는 하루바삐 서로 합심하여 하나의 교회로 재통일 하라!』 이 하나의 교회로 재일치의 사업이야말로 현 그리스도교계를 수습하고 참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로 돌아가는 길이며 또한 이는 현시대의 절실한 요구이며 지상명령이기도 하다.
3. 가톨릭과 東方교회
11세기에 분열된 동방교회(Greek Fussian Orthodox Church)와 가톨릭교회와의 재일치에 대한 욕망의 역사는 11세기 분열 직후부터 이미 동서방 양 교회내에서 다같이 싹트고 있었다. 동방교회도 11세기 이전에는 모교회(母敎會)인 「로오마」 가톨릭교회 내부에서 살아오다가 11세기에 비로소 분가하였기 때문에 옛모가(母家)에 대한 향수와 미련이 없지 않을 수 없다. 동서양교회에 있어 참다운 신앙을 갖고 교회의 유익만을 생각하던 교직자나 신자들은 항상 동서양교회의 간격을 메우고 또 서로 화해하려고 무진한 노력을 경주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몇몇 야심있는 군주·교직자·신자들의 순 인간적인 이해타산과 정치적 작난으로 인하여 동서양 교회의 재일치 운동은 항상 방해되어 왔다. 가령 서기 1054년에 동서방교회가 완전히 서로 분리된 직후, 즉 1073년에 동「로오마」제국의 황제 <미카엘> 7세(Micael 7세)에 의하여 동서양교회의 재일치에 대한 회담이 마련되었으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아무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1145년부터 1153년 사이에 「로오마」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 <인노첸시오> 3세 그리고 동「로오마」 제국의 황제 <엠마누엘> 1세와 <알로이시오> 3세 사이에 동서양교회의 재일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동「로오마」제국의 황제들은 「로오마」 교황에게 『전 그리스도교회에 있어 교황의 종교적 수위권을 인정해 줄 것이니 그대신 동「로오마」제국 황제의 전 그리스도교국에 있어 정치적 수위권을 인정해달라』는 부당한 제의 때문에 마침내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12-13세기에는 서방 그리스도교 나라에서 「예루살렘」 성직 탈환이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십자군 출정에 있어 서방 그리스도교국의 제왕들은 그리스도교 정신과 교리에 어긋나는 포학한 행동을 감행하므로 동서방교회 사이에 싹터가던 재일치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을 뿐 아니라, 동방 <오르토독스」인들에게 서방 나전교회(羅典敎會)인에 대한 미움을 더욱 불지르게 하였다.
그 후 1439년 이태리 「플로렁스」에서 열린 제17차 대공의회에서 동방교회의 대표주교들이 서방 가톨릭교회에 귀의한다고 공적으로 서명하고 동서양교회의 재일치를 전세계에 선언하였지만 그러나 동방교회 신자 대중의 호응이 없어 실제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우리는 동서양교회의 분열의 역사에서 미움과 편견을 가지고는 절대로 완전한 재일치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동방교회는 그들의 신조가 가톨릭의 그것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재일치 문제에 있어서는 「프로테스탄트」의 경우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또한 인정할 수 있다. 더욱이 현재 동방 「오르토독스」 교회가 전파되고 있는 소아세아제국에는 무신론적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종교를 탄압 박해하고 있기 때문에 동방교회는 전멸의 위기에 놓여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전그리스디안의 정신적 유대와 도움을 받기 위하여서도 동방교회는 가톨릭교회와 재일치하여야 된다는데 중론이 돌아가고 있다.
4.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교파와의 재일치에 대해서는 「프로테스탄트」교파 내부에 다시 많은 분파가 있기 때문에 어려운 난관이 첩첩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16세기에 <말틴 루터>가 소위 종교개혁을 한참 부르짖고 있을 때에 이미 그리스도교회의 분열의 큰 재앙을 맞고자 많은 이가 여러모로 활약 노력하였다. 가령 당시 독일의 황제 <찰스> 5세와 <페르디난드> 1세는 그 좋은 예이다. 이들은 한 나라의 군주라는 위치에서 그리스도교회의 분열을 막으려고 크게 노력한 이들이지만 개인의 자격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재일치에 크게 이바지한 선의(善意)의 「크리스디안」들이 또한 많이 있다.
가령 17세기에 독일의 유명한 철학가 <라이브니즈>(=Leibnis, 1646~1716)는 「프로테스탄트」의 대표로, 불란서 「모오」(=Meaux)의 주교 <보쑤엩> (=J,B,Bossuet, 1627~1704)은 가톨릭의 대표로 양인이 둘 다 그들의 넓은 시야와 도량(度量)에서 그리스도교회 재일치라는 절박한 시대적 요구를 달성시키기 위하여 서로 크게 공헌한 것은 교회통일사(統一史)에 크게 빛나는 사실이다. 비록 정치인들의 반대와 그 외 쌍방의 견해차로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지만 <보쑤엩>-<라이브니즈> 회담은 하나의 비공식적 교회재일치 운동의 「이니씨아티브」(시초)가 된 것이다. 19세기 말에 와서 지성의 교황으로 후세에 불리우는 <레오> 13세의 간곡한 호소에 호응하여 영국 「옥쓰포드」 대학의 <헨리.뉴만)(=J,Henry Mewman)의 주동으로 일어난 소위 「옥쓰포드」 운동(=oxford Movement)은 근세에 와서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함정을 메우는데 큰 도움이 된 것이다.
1925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호름」에서 개최된 「그리스도교회통합회의」(=Christian Ecumenical Conference) 이래 「프로테스탄트」교파 내에도 통일에 대한 운동과 욕망이 높아지기 시작하여 적어도 「프로테스탄트」 제교회만이라도 하나로 뭉쳐보자는 운동이 선풍적으로 번져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