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6) 금지된 마을 ②
미셀·까루우즈 原著
발행일1961-10-08 [제298호, 4면]
탐험가의 안내인치고는 기묘한 상태였다. 그러나 <후꼬오>는 <말도세>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토착인들에게 대해서 완고하며 그리고 이제는 금전 문제에 대해서는 담판이 끝났으므로 그점에 대해서 지극히 미묘한 태도를 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에 반하여 여정(旅程) 문제에 대해서는 두 나그네 사이에 분쟁이 끄치지 않았다. <말도세>는 남(南) 「모록코」와 서(西) 「모록코」왕(王)의 지배하에 있는 대도시(大都市) 몇 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밖의 땅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적었다.
『나는 내가 가고 싶어하는 땅에 대해서 그에게 자세히 설명했다』고 탐험가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따으이 이름조차 대부분 알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지명(地名)을 그에게 열거해 보아도 그의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질 않았다. 그러나 <말도세>는 「모록코」에 도착한 다음부터는 이처럼 젊은 동반자(<후꼬오>는 그때 나이 24세였다.)이니까 제말대로 할 수 있을 것이며 나의 계획을 자기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갈 길은 대단히 위엄했으며 그는 나의 계획을 하나도 변경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그에게 있어서는 이중(二重)의 실망이 있었던 것이다. 우선 여행의 조건이 <말도세>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는 전연 딴 것이었다. 그는 불평 없이 복종하지는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를 사이에는 옥신각신이 시작되었다』
이런 충돌은 시초에 불과했다. 「느무르」에서 얼마가 걸릴런지 알 수 없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하여 <후꼬오>는 출발 후 얼마 안 되어 여정(旅程)을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다길을 택하기로 정했다. <말도세>는 「느무르」에서 늘짱을 부리고 싶어했다. 그러는 편이 안전하며 그에게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여정(旅程)으로 출발하도록 그에게 결단시키기까지에는 맹렬한 논쟁이 필요했다. 6월20일 「지브랄랄」에 잠시 기항(寄港)한 다음 <후꼬오>는 「탕제」에 도착했다. 그는 처음으로 「모록코」의 땅을 디딘 것이다. 「오리브」와 종려와 색색이의 모자익으로 덮인 회교사원(回敎寺院)의 높은 탑으로 둘러싸인 흰 집들이 즐비하고 바다에서 성곽에로 길게 구불구불 뻗힌 수없는 소로(小路) 속에 있는 큰 항구에 그는 발을 디려놓았다. 그의 주위에는 환상적인 세계가 웅성대고 있었다. 광장에서 외치고 있는 장사군들, 검은 두건이 달린 외투를 입고 말을 타고 가는 사람들, 뱀을 놀리는 사람, 노세 등에다 물통을 싣고 종을 울리며 물을 팔러 다니는 물장수, 소리를 있는데로 지르는 거지, 땅바닥에서 야자열매를 파는 배일을 쓴 여인, 토기(土器), 가금(家禽), 가지각색의 화초, 노천에서 연설하는 사람, 거리거리로 다니며 노래하는 사람과 악기를 치는 사람, 유럽인, 유대아인, 아라비아인, 벨에르인, 흑인노예, 가지각색 인종의 왕래.
<후꼬오>는 어리둥절 했다.
그러나 우물주물하지는 않았다. <틸만>씨의 소개장은 「탕제」의 프랑스공사 <올데가>씨로 하여금 그를 우대하게 했다. 그는 <휏쯔>와 <테투앙>의 프랑스 총영사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가지고 그곳을 출발했다. 그러나 가장 귀중한 것은 「웨장」의 「세리프」(마호멧트의 후예에게 수여되는 종교적 귀족 칭호)인 <무레이·아브드·에스·세람>의 친필 소개장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세리프」는 그 당시 「모록코」에 있어서 가장 위대하며 비범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18세기에 황태자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며 북아프리카의 많은 지방에 광채를 던진 「파이비아스」교단의 으뜸인 <무레이 아브드 에스 세람>은 그 나라에 중세기의 프랑스에 있어서의 「쌩드니」의 수도원장들과 같은 정신적 정치적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 거대한 종교적 형제단장(兄弟團長)은 그래도 영국부인과 결혼하고 있었으며 유명한 프랑스 통이었다. <후꼬오>가 「탕제」를 통과한 그 이듬해부터 <무레이 아브드 에스 세람>은 그 아들 하나를 급비생으로 「알제」의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자신은 1884년에 프랑스 피보호자라는 칭호를 받은 일이 있다.
새로 빌린 노새를 타고 <죠세프.후꼬오>와 <말도세> 제관 두 사람은 모록코의 땅에 힘 안들이고 들어가 우선 「테투앙」으로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알제」의 유대아인 <메나헴>의 소개로 유대아인가(街)에 거주하는 그의 형제 <쟈꼬브 다낭>의 집에 유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친절한 접대를 받기는 했으나 되도록 사양했다. 그들은 가장 작은 방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층에 있으며 노대의 옆에 있는 방이었다. 그들은 침대보다도 「멧트리스」로서 만족했다. 그리고 그 작은 방에서 빌려온 작은 난로로 자취(自炊)하는 것만을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꾸며대기 잘하는 <말도세>의 성벽은 이때 분명히 감퇴되어 있었다. 그는 딴 소리는 덧붙히지 않고 다만 자기의 동반자를 제관 <쿠오보>라고 소개할 뿐이었다. <다낭>댁 사람들은 충심으로 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 집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장남인 <쥬다>는 이 나그네들이 자기네들 방에서는 프랑스 말로 얘기를 하며 또 그중에 젊은 사람은 특히 거동이 점잔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디서 배웠는지 아마 그 숙부 <메나함>에게서 배웠는지 프랑스 말을 배운 일이 있는 <쥬다>는 「쿠보오」 제관의 말이 대단히 맘에 들기 때문에 그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했다.
『<쿠보오> 제관은 매일 아침 모욕물을 나에게 부탁했다. 나는 그것을 물통에 준비했다. 우리들 집에는 모욕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에게 품값으로 스페인화 25전을 주었다. 그것은 그 당시 대단한 금액이었다』
『처음에 나도 집안 사람들에게 우리집 손님이며 내가 매일 아침 모욕물을 준비해주고 있는 이 사람은 헤브레아 말도 아라비아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이 나에게는 제관인 것 같지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밤에 우리집 노대에서 기상관측을 하느라고 한참도 자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집에 미친 사람을 두었다고 아직 나이어린 아이들을 위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느 일기 좋은날 「테투앙」의 프랑스 영사인 <아브데라티프>씨가 우리집에 도착했다. 영사는 「탕제」의 프랑스 공사의 명령에 의하여 우리 손님들의 일을 보아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유럽인도 아직까지 아무도 발을 들여 놓은 일이 없는 아라비아의 성도(聖都) 「세샤우엔」에 들어가서 조사를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테투앙」의 「파샤」(地方總督)로부터 보내온 네 사람의 병정을 데리고 우리집의 제관 두 사람은 「세샤우엔」으로 떠났다』
두 사람의 나그네는 기가 막혀서 급히 되돌아 왔다. 도중에서 「아라비아」인들은 <쿠보오> 제관이 가지고 있는 과학기구를 보고, 그 제관이 탐험가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달아나야 했다. <후꼬오>는 이제야 참으로 모록코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도세>도 동감이었다.
그들은 또다시 끝없이 언쟁을 했다. 그것은 미리 예정했던 여정은 처음부터 실패로 돌아갔으며 다음길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목적지는 「휏쯔」라고 하는 큰 도시였다.
그 지방은 공식적으로는 술탄(君主)의 지배하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안전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웨진」의 「세리프」의 소개장을 가지고도 「세샤우엔」을 가는 도중에서는 그들을 보호하는데 무력했다. 그들이 이런 것을 의심하는 것도 이제 방금 그것을 경험하고 왔기 때문이다. 본래 이 나라에는 무장한 약탈자들이 많아서 그것들이 온 고장을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을 위협하여 지독한 국고에 징수당하고 얼마 안 되는 농민의 것을 약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토질은 훌륭하나 농민들은 가난하고 그들은 되도록이면 가련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여러 가지 궁리를 하는 것이었다. 동쪽으로 멀리가면 갈수록 통행은 곤란했다. 그곳은 무정부 상태이며 불귀순의 부족들이 제멋대로 약탈을 감행하고 있는 「리프」의 저편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