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얼굴이 태양같이 빛나고 그 의복이 눈같이 희더라』
사람을 첫눈에 사랑하기 시작하여 일생을 번민하는 열정을 세상은 가끔 이상(異常)이라고 비웃는다. 그러나 그 당사자의 눈에는 그 사람은 이미 처음보는 사람이 아니고 욕망과 환상을 섞어 그려보던 이상(異常)의 청사진이 바로 한 현존과 부합한 때문이기에 그에겐 너무도 오랜시간을 사귀어 온 구면으로서 인정을 느낄 수 있음은 의려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모든 사람은 일찍부터 자기가 조아할 수 있는 형태를 청사지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화되지 않았기에 자기 자신 임의(任意)로 표현할 수 조차 없는 것이지만 어쨌든 겨엄과 습관과 사고와 염원사이에서 자가가지 못한 순간에 엄연히 형성되어 있는 이상(理想)이 있고 이것을 개괄하여 궁극적으로 진(眞)이며 선(善) 또 미(美)로 얼버무려 두는 것이다.
형상화된 이상을 손에 잡지못한 막연한 욕망이 때로는 그 영상을 표착하겠다고 생명까지 희생당한다. 엄일한 의미에서 진·선·미의 완전한 화음으로서의 절대적인 이상은 이해가 닿는 사람에게 신(神)으로서 현존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을 판단하여 완전히 없다고 절망하는 경솔한 허무와는 달리 영원한 삶을 누리는 복지가 있으니 오늘 제자들에게 천주로서의 예수를 잠시 보여준 것 같이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만 끝날에 주의 계명으로 판단하여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옛날 「마케도니아」왕 <필립>은 아름다움으로 월등한 「아테네」의 얘기를 들었을 때 『그 도시는 어떤 대가(代價)를 치르고서라도 내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절규했던 것이다. 사람의 지혜는 한정되어 불행하게도 인식이라는 한계선(限界線)밖을 보지 못하여 육체적인 감관의 인지 이상을 확연히 보지못하는 지능이 있지만 좀더 눈을 크게 뜨면 어렴풋이나마 보다 초월한 세계의 음향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을 모독하며 희희낙낙 세상을 향락하던 오만된 사람들도 삶과 죽음을 판가름하는 궁지에 몰리면 태고(太古)가 물려준 버릇인지 「하나님」을 찾는다. 은연중에 우리 본성에 배고 물든 천국에 대한 잠재의식의 반사적인 표현이라 보아도 좋겠다. 물론 천당을 증명하는 일은 너무 이기차다. 사람들은 이성으로 수궁이 가지 않을 때 그것을 뛰어넘거나 묵살해두거나 피해 돌아가는 것으로 그런대로 교리를 터득하고 믿는 것으로 해둔다.
그러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그런 해슬픈 것이 아니다. 간단히 생각해봐도 우리를 위해 다른 세계를 마련하시겠다고 가신다던 예수의 말씀이 기억된다. 그보다 앞서 신앙은 적어도 내세의 보상과 심판을 기준하고 성립될 수 있는 것인 만큼 천당을 빼놓은 교리는 허수아비다. 천당과 내세(來世)를 부인한다면 근본적으로 인간심리중의 염원이란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일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가능한 한이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지상의 삶은 불만투성이다. 설혹 심혈을 다해 부귀나 건강이나 명성이나 훈장을 얻었다고 한들 거기에는 또 별난 불행의 구멍이 터지게 마련이다. 행복의 요소는 될 수 있으되 그 하나나 혹은 몇으로 완전할 수 없는 지상의 영화 여기서 사람들은 피안을 그리는 염원을 싹티우기 시작한 것이다. 염원대로 완전한 그 무엇은 존재하고 그것의 당대적인 불완전한 조각들이 이렇게 또 저렇게 완전의 현신으로 나타나보는 것이다. 그 무엇은 천주다. 그리고 그 피안은 우리 교리에서 천당인 것이다.
수년전 「시카고」의 한 화가가 큰 나랙를 달고 길고 흰 의상을 걸친 대여섯 사람이 구름 위에 소요하며 「하아프」를 타고 입을 벌려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는 그림을 그리고 그밑에다 『천당』이란 제목을 붙였다. 물론 자기 이상 속의 자기만의 천당인지는 모르되 천당은 천재적인 작가나 화가가 표현하는 세계또 아니다.
천당은 근심걱정과 유혹과 죄와 질병과 죽음이 없는 안식처이지만 그곳의 안식은 부패한 나태가 아니다. 「콜프 코스」며 「스케팅」 장소며 성적쾌락이 있는 곳도 아니다. 다만 장차 그의 진정한 즐거움과 평화와 안식을 맛 볼 수 있는 천주의 가정인 것이다. 지상의 유락은 한계가 있고 시간이 지나면 실증과 권태를 면치 못한다.
그러나 그곳의 법열은 무한한 것이며 항상 흥미롭고 청신하여 새로운 맛을 주는 것이다. 고통도 질병도 불견(不見)도 없고 맹인도 벙어리도 미친이도 없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걱정치 않아도 좋은 것이며 석별의 아쉬움에 마음쓰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한 그곳의 지복(至福)이 있다면 그것은 지존하신 성안(聖顔)을 볼 수 있다는 미쁨일 것이다. 의합한자로 가르치시기 위해 주의 명을 주셨고 육정으로 자기 그릇을 가지지 말고 천주를 위해 정당하게 가지도록 또 형제를 속이지 말고 음란을 피하도록 미리 권유하심으로써 당신의 자애를 나누시려 뜻하시는 것이다. 호나란과 핍박이 올 때도 지복소인 천당을 눈앞에 되새기고 항시 마음에서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 청사진은 기어코 나와 너의 것으로 구체화 하기로 약속하신 말씀을 감사해야겠다. 아멘.
李鍾淳 神父(서울 明洞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