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入門(입문) 講座(강좌)] ⑧ 가톨릭은 무엇을 믿는가? (3)
발행일1962-03-18 [제319호, 2면]
죽음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그러나 같은 모양으로 또 같은 이유로 죽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육체-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육체, 극히 소중히 위해오던 육체 그의 향락과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 오던 그 육체를 잃을 것을 생각하고 죽음을 몹시도 무서워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의 육체를 혹사하기까지 해서, 때로는 남을 해롭게까지 해서 모으고 이루어 놓은 재산과 소유들을 작별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죽음을 겁낸다. 또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죽으면 그들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의 고통을 받기 시작하지나 않나 해서 죽음이라면 그 소리만 들어도 전율(戰慄)한다.
죽음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긴 하지만 조간 석간 신문을 펼쳐 보든지 라디오 수화기의 「스위치」를 돌려 보든지 그많은 영화관의 「스크린」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든지 홍수 같이 흘러 나오는 소설과 만화책들을 보든지 자살 피살 전쟁 죽음의 재유행병 등등 죽음에 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렇고 보면 현대인의 생활이란 성(性)을 제외하고는 죽음이 지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죽음이란 일대신비지사(一大神秘之事)이다. 보통으로 보아 우리는 항상 죽음에 대하여 우리머리 안에 바르지 못한 질문을 내거는 듯 싶다. 우리가 모(某)가 죽었다는 부고를 받으면 본능적으로 『그가 어떻게 그렇게(즉 죽게)되었나?』라고 질문한다. 가톨릭교회는 그 신자들에게 『죽음이란 어떻게 해서 우리 각 사람에게 오느냐?』란 설문 보다도 『죽음이란 무엇인가?』란 설문에 회답을 줌으로써 죽음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그것에 임(臨)하는 바른 태도를 가르쳐 둔다.
죽음이란 무엇이냐… 가톨릭교회는 가르치기를 죽음이란 「생명의 댓가」(生命의 代價)이라고 한다. 이 답은 성서나 속서의 어디서도 찾지 못하는 답이다. 이 답을 주는 것은 「십자가」이다. 한 이천년 전에 세계의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동네 밖에 낮으막한 동산 위에서 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의 손발의 상처에서 내리는 피는 십자가가 박혀져 있는 땅을 적셨다.
우연한 일일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동산을 사람들은 「해골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은 사람은 유명한 분이다. 그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위에 못박혀 죽은 십자가는 본시 사람에게 영감(靈感)을 주는 것도, 「로맨틱」한 것도 미술적 가치가 있을만큼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형집행하는데 쓰는 틀이었다. 보기만 하여도 몸서리가 치는 휴칙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근육(筋肉)을 뚫고 들어가는 쇠못이 따라다녔다. 거기에는 피와 땀과 목마름과 실망이 붙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지중해의 더위와 흉칙한 파리떼들이 돌고 있었ㄷ. 어느것 하나 예술의 대상이 된상 싶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매달려 죽은 이후로는 일종의 형구(形軀)에 불과했던 그 「십자가」는 달라졌다. 그것은 세상의 유명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눈을 끌었다.
수많은 시인과 작곡가와 음악가들의 말할 수 없이 큰 영감(靈感)과 시흥(詩興)을 주는 셈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이 못박혀 있는 십자가는 - 본시 흉칙하던 십자가는 금과 은과 흑단으로 만들어져 수억만 가톨릭의 가정의 방방에 교회에 학교교실에 걸려있고 공설 건물에 광장에 크게 세워져 있다.
십자가는 세계의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에 보물들로 되어있다. 그리고 가톨릭의 목에 걸려 있다. 「십자가」가 왜 이렇게 되었을가? 그것은 그것이 나타내는 사형 때문이 나이고 그것이 우리 인생에게 『죽음이란 무엇이냐』란 설문에 정확한 해답을 주는 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神)으로서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와서 33년동안 지상생활을 했다.
그는 이 33년 동안에 많은 놀라운 일을 했다. 수없이 많은 신기한 기적을 행하였고 인간의 동등에 대하여 인간 각 개인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하여 쇄신하고도 혁명적인 사상을 인류에게 주었다.
그는 2000년 동에 언제나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는 책의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은 그가 가장 중대한 사업 - 그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하는 준비운동에 불과했다. 그가 그의 가장 중대한 사업을 완수하는데는 불과 일초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가 그의 가장 중대한 사업을 완수한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죽는 그 순간이었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려고 이 세상에 왓던 것이나 그는 인류의 죄의 사(赦)함을 시으로부터얻어 주기 위해 죽은 것이다.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신인 그리스도가 죽은 것과 같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죽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맨첨 <아담>과 <에와>가 비록 세상에 조성되었지만 신의 현존(現存) 앞에 마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건너다니듯 자유롭고 걸을 수 있었고 또 죽지 않아도 좋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을 배신(背信)하여 범죄했었다. 그래서 그 죄의 결과로 그들은 죽어야 했었고 그들이 후손인 우리들도 다 죽어야 한다. 우리가 죽어야 하는 것은 아주 없어져 버리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잃었던 신을 다시 보기 위해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으로써 이것을 증명하였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 그와 같은 태도로 죽는다면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행복을 사(購買)하기 위해 지불하는 댓가가 되는 것이다.
『좋은 물건을 사려면 값을 많이 주라』는 말이 상식적인 것이 되었다. 죽음은 확실히 말할 수 없이 비싼 값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불하고 고유하게 되는 신(神)은 무엇으로도 - 인간의 죽음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톨릭은 죽음을 맞이할 때 흔연한 마음으로 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