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각 제도가 준비도 되지 않은채 우리는 해방을 맞이하여 정치, 경제, 교육기관에 글자 그대로 진공상태를 보였고, 민족사(民族史)에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한 6·25 동란을 겪는 동안 이상 야릇한 사조(思潮)들이 물밀듯이 이 나라에 들어오게 되어 어떤 것이 옳은 말인지 어느 쪽을 향해서 걸어야 할 지 갈팡질팡하며 이름을 파서 못된 정치가들이 백성을 위하기는 커녕 근대문화가 발달된 나라의 사회경제 제도에서 능히 일어날 수 있는 기술적 공적 사기술을 배워 순박한 대중을 못살게 하며 그들의 생활방침을 따르지 않으면 굶어 죽을 정도로 사기와 거짓말이 공공연하게 인정되어 있는 것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형상이다.
견디다 못해 이어 두 번이나 혁명이 일어나고 이제는 좀 잘 해야지 또 잘 되었으면 하는 것이 국민 대부분의 원이요 갈망인가 싶다. 이렇게 사회의 참된 계획 재건이 있어야 할 단계에 있다는 것도 가히 느낄 수 있는 표정이다. 마음의 개조 국민 각자가 자각하므로 될 수 있다고들 한다. 또 그외에 여러 가지 말들을 하는 것을 가끔 길에서 들을 수 있다. 없어질 현세 보화를 유일의 인간 가치로 정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불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허덕일 때 거기는 반드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침투하는 법이다. 한편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어떤 매력을 주기 시작하면 유일한 투쟁 목표인 『신(神)에서 대중을 이탈』시키고 원죄로 약화된 인간을 가치순서를 바꾸게 하고 윤리 법칙을 무서워하게 해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 사회는 또다시 우리가 경험해 온 이상의 무서운 현상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한 사회를 계획하려면자연법과 이것을 관할하는 초자연적인 힘이 필요하게 된다.
먼저 위정자들은 덮어놓고 국민생활의 향상만을 내걸고 경제적 윤리가 유린되지 않도록 처치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자기 일거 일동을 좌우하는 절대가치를 똑똑히 가져야 한다. 인간의 행위를 움직이는 어떤 목적이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으로 거꾸로 인정될 때 모든 행동이 옳게 보일 수가 없다. 단지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한 경제력을 절대적인 가치로 받아드릴 때 그것을 행사한는 인간이 그것을 추구하고 사용할 때 신의 법칙과 자연 윤리에 맞을 리 없고 남의 권리, 둘째 풍기를 계획하는데 완덕의 기초가 되는 애덕이 큰 역할을 해야 한다. 딱딱하고 엄격한 정의만의 사회계획은 순전히 교환식 정의만을 보장할 수야 있겠으나 아무리 인간이 정의에 따라서 얻는 것이 있다. 하드라도 아직도 거기는 사랑에 속하는 분야가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정의가 아무리 충실히 실행되드라도 그것은 사회 갈등의 원인은 없애 버릴 수는 있겠지마는 마음을 화합시키고 우정을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서로서로의 마음의 결합과 이해는 사회질서를 보장하고 모든 제도가 협조적 정신으로 발달해 나가는데 주춧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감정과 정서의 일치가 없고서는 아무리 현명한 법칙과 규율이라도 쓸대없는 것이 되고만다. 따라서 공동의 행복을 협력일치하여 도모할 때 사회 구조의 각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같은 주인을 가지고 한 형제됨을 터득하게 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된다. 즉 각자가 남이 고통을 당할 때 자기도 같이 고통을 당한다는 관념 아래 비로소 참된 사회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때는 질투와 오해로 쌓인 우리 사회가 남의 과오를 이해하는 관대한 태도를 취할 줄 아는, 그리고 남의 일을 상관치 않고 자기의 지위를 정직히 또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일반의 복리를 위해서 공헌한다는 것으로 여기고 큰 즐거움을 깨닫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될 것이다.
(筆者=社會學 博士 大邱敎區長__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