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 23세 社會回勅(사회회칙) 마뗄 엩 마지스뜨라(MATER ET MAGISTRA) 全文(전문) (9)
발행일1961-10-15 [제299호, 2면]
■ <제4부> 교리, 정의 그리고 사랑 안에 사회관계를 재건하기 - 불완전하고 그릇된 「이데올로기」
결국 이 과학적 및 기술적 진보가 그것 때문에도 사회적 관계가 각 개별적 정치 공동체들과 세계적 범위 양방에 관하여 보다 인간적 균형 안에 재건되어야 한다는 문제가 남는다.
현 세대에 있어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들이 안출(案出)되어 이러한 생각으로 퍼져 나갔다. 어떤 것은 태양에 쪼인 구름과 같이 사라졌다. 어떤 것은 실실적인 변화를 당하였다. 다른 것들을 시들어지고 인간의 심리에 대한 그들의 매력을 아직 더 잃고있다. 그 원인은 그것들이 어떠한 덜 깊은 인간의 양상만을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이데올로기」들이 가장 진보된 경제적-사회적 체계도 제거할 수 없는 질병, 번민 불완전성과 같은 어떠한 불가피한 인간적 불완전성을 고려에 넣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때에 비록 폭력에 짓밟히고 또는 교묘하게 질식을 당할지라도 끊임없이 도처에서 그 자체를 표현하는 깊고 또 멸망할 수 없는 종교적 긴급성이 있다. 사실상, 가장 기본적인 현대의 오류는 인간 영혼의 요구를 시대착오로서 또 인간의 진보에 대한 장애로서 제거해야 할 환각(幻覺)의 표현이나 어떠한 우발사(偶發事)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그러면서도 이 종교적 긴급성을 통하여 인간 존재가 자기들이 무엇을 위하여 실지로 존재하는가를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오, 주여 당신을 위하사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 쉬기까지는 불안하나이다』라고 부르지졌음과 같이 천주에 의하여 천주를 위하여 창조된 존재임을 스스로 계시한다. 그뿐 아니라, 그 기술적 및 경제적 진보가 어떠하거나 이 세상에서 인간들이 천주께서 창조하신 일체 현실적 존재의 정당하고 궁극적인 원인이신 천주의 창조물이오 자녀들로서의 자기들의 존엄감(尊嚴感)에로 돌아오기까지는 정의도 평화도 없을 것이다. 천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와 같은 종류의 인간들에 비인간적임은 사회의 질서 있는 관계가 진리와 정의와 사랑의 샘이신 천주와 인간 의식과의 질서 있는 관계를 예상(豫想)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도교 문명 국가까지 포함하여 여러 나라에서 최근 수십년간 광폭(狂暴)한 내가 귀중이 사랑하는 형제들과 아들들이 그 많은 수가 당하는 박해가 박해받는 자들의 존엄한 우월성과 박해자들의 교묘한 야만성을 우리에게 더욱 더 명백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그 박해가 회개의 볼 수 있는 징조를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나게한다. 그러나 현세대의 가장 악성의 전형적 양상은 현세적 질서가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주치인 천주로부터 떨어져 나가면서, 그러기 때문에 천주를 원하는 인간의 탄식을 억압하면서 가능하면 소멸시키면서, 견실하고 성과 있는 현세적 질서를 재건하려는 그리고 인간의 위대성이 솟는 샘이며 인간의 위대성이 영양을 취하는 그 샘을 말림으로써 인간의 위대성을 찬양하고자 하는 불합리한 기도(企圖)에 있다. 가장 혹독한 기만의 한가운데 유혈(流血)의 요구 고도 드물지 않게, 염감된 책에 성명된 바와 같이 『주께서 그 집을 짓지 않으신다면, 그 집을 지으려는 너희들의 수고가 헛되리라』는 사실을 날마다의 경험이 목격하기를 계속한다.
■ 교회의 사회교훈의 영속하는 현실성
교회는 항상 시대적인 생활 방식의 기수(旗手)이며 선구자이다.
그러한 관념의 기본 원칙은 이미 그만큼 원대히 말한 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새인적 인간 영혼들이 천성으로 원래 사회적 성격을 구비하며 또 하여야 하는 한(限) 그리고 그들이 초자연 질서에로 오름으로써 그들이 섭리의 계획 안에 있으며, 또 있어야 하는 한(限) 개인적 인간 존재들이, 사회 생활이 영위되는 모든 제도의 주치이며 목적이며 주체(主體)이며 또 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신성한 존엄성을 보증하는 이 기본적 원칙으로부터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가 특히 이 최근 세계동안 유식한 사제들과 평신도들의 협력으로써 현세적 질서의 각종 범위와 동시대(同時代) 사회의 특색이었기 때문에 만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즉 인간의 천성을 토대로 하는 보편적 기준에 따라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확실한 길을 명확하게 지적하는 하나의 사회교훈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어느때 보다 더 오늘날에 이 교훈이 알려지고, 회득(會得)되어 서로 다른 실정이 허용하고 요구하는 형식과 방법으로 사회적 현실로 변화되어야 함이 떠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가장 어려운 과업이나 전세계에 산재하는 나의 형제들과 아들들에게만이 아니라 선의(善意)를 지닌 모든 인간들에게도 내가 가장 따뜻이 권고하는 실천에 대한 가장 숭고한 과업이다.
■ 교시(敎示)
나느 ㄴ그리스도교적 사회 교훈이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의 필수 부분임을 강력히 재확인한다.
수개(數個)의 연구기관에서 이 사회교훈을 일정한 기간 가르쳐 왔음을 내가 만족히 주목하는 동시에 이러한 교훈을 각종의 가톨릭학교, 특히 신학교에서 체계있는 정규과목(正規科目)으로 신장하기를 권고할 생각을 억제할 수 없다. 이 사회교훈은 본당과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종교교육 계획 안에 삽입되어야 한다. 또 이 사회교훈은-일간신문, 기간(期刊), 학문적 및 통속적 양방의 출판물, 라디오 및 「텔레비죤」- 등 모든 근대적인 발표 방법으로 보급되어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인 평신도들이 이 사회교훈을 앎으로써, 자기들의 행동을 이 사회교훈에 일치하게 함으로써, 이 사회에 교훈을 남들이 이해하도록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이 사회교훈의 전파(傳播)에 대하여 크게 공헌할 수 있다.
이 사회교훈이 현대의 난(難)문제 해결을 위하여 안전한 길을 제공하는 사실을 그들이 보여줄 때 이 교훈의 진리와 효력이 가장 쉽게 그 사실을 표시함을 납득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 사회교훈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이 사회교훈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게하며 이 사회교훈의 광선(光線)을 그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교육
사회교훈이라는 것은 실지화(實地化)하여야 할 것이므로 그저 단순히 설명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 사상이 진리며 그 목적이 정의이며 그 추진력이 사랑인 그리스도교 사회교훈에 있어 특별히 그러하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이 사회교훈을 알기만 하지 말고 이 사회교훈에 따라 교육될 가장 크게 중요한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교적 교육은 그것을 모든 종류의 의무에 뻗치므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적 교육은 사회적 및 경제적 활동을 그리스도교적 방식으로 여우이할 각자의 의무를 신자들 가운데 주입(注入)하고 육성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론으로부터 실천에로 옮아가는 과도(過渡)는 바로 그 성질상 어렵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의 사회교훈과 같은 사회교훈을 구체적으로 세밀히 실천하려는 경우에 특별히 그러하다. 인간 존재의 깊이 뿌리박힌 이기주의와 현대 사회를 적신 물질주의와 특별한 경우에 정의의 유구를 정확하게 가려내는 곤란 때문에 어렵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의무를 가르침은 이 교육을 위하여 충분치 않다.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게 할 방법을 실천적 행도응로써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 평신도 사도직 단체의 과업
경제적 및 사회적 일에 있어 그리스도교적 방식으로 행동하는 교육은 피교육자가 자기들의 고유한 형성에 있어 적극적인 구실을 하지 않고는, 그 교육이 행동을 통하여 시행되지 않고는 성공하기 어렵다.
사람이 자유의 올바른 사용을 제외하고 자유의 정당한 사용법을 습득할 수 없음과 똑같이 사람은 사회적 및 경제적 분야에 있어 사실상 그리스도교적 행동으로써 그 분야에 있어서의 그리스도교적 태도를 배운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 교육에 있어 평신도 사도직의 협회와 조직 특히 현세적 질서에 있어 경제적 및 사회적 부문의 그리스도교화를 특수한 목적으로 삼는 단체가 중요한 구실을 한다.
실로, 이러한 모든 단체의 많은 성원(成員)들이 보다 완전히 자기를 형성하기 위하여 또한 청년의 사회교육에 공헌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일상 경험으로부터 이익을 꺼낼 수 있다.
이 점에 있어 절제(節制)와 희생을 요구하는 그리스도교적 인생관을 귀천(貴賤)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기(想起)케 함이 시기에 적절하게 생각한다. 불행히도, 육신과 영혼 양방으로 커다란 손실이 따르는 쾌락추구와 모든 욕정(慾情)의 완전한 만족으로 인생을 격하(格下)시키는 우세(優勢)한 쾌락주의적 인생관과 경향이 도처에 있다.
자연적 수준으로 생활의 간소와 과욕(寡慾)한 중용은 선(善)을 생산하는 지혜이다. 초자연적 수준으로는 복음(福音)과 교회의 금욕(禁慾)적 전통이 육체를 극복하는 정신의 지배를 보장하는 극기와 보속의 정신을 요구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죄에 물들지 아니한 당신의 모친 외에는 아무도 제외될 수 없는 죄에 해당하는 벌을 면하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사회적 원칙과 지침(指針)을 세밀히 실천함에 있어 사람은 보통으로 세단계를 거쳐 간다. 상황(狀況)을 관찰(觀察)하기. 관찰한 그 상황을 이 모든 원칙과 지침에 비추어 판단하기. 그 상황 자체가 허용하는 방식과 정도에 따라 가능한 그리고 당위(當爲)할 바를 결정하기.
이것이 『보라, 판단하라, 행하라』라는 이 세 마디말로 보통으로 표현되는 세 가지 단계이다. 청년들로 하여금 이 세 단계를 침사묵고(沈思默考)케 하여 그 세 단계를 실천에 옮기도록 함이 특별히 중요하다. 이러한 방법으로 얻은 지식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실지 행동으로 옮겨야 할 일이다.
교리(敎理)의 응용에 있어 고결하고 성실한 가톨릭 신자 가운데서도 의견의 차이가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때, 그들은 상호간 존경과 존중을 계속하여 살리도록 경계하여야 하며 적절한 행동을 위한 동의점(同意点)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그들은 보다 좋다거나 가장 좋다는 구실(口實) 아래 끝이 없는 토론에 자기들의 기력을 소모하지 말 것이며 가능하고 또 그와같이 의무가 되는 선의 실천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적-사회적 활동 중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들과 인생관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가끔 밀접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환경 가운데 나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언행이 일치하도록 그리고 종교와 도덕상 타협을 절대로 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여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 본질이 선하며 또는 적어도 선으로 유도(誘導)할 수 있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당장에 충성히 협력할 용의가 있는 이해(理解)와 청렴(淸廉)의 정신으로 활기를 띄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교회 당국이 그 논쟁점(論爭点)에 관한 결정을 지었을 때 가톨릭 신자들은 그 방침에 반드시 순명하여야 함은 교회가 단순히 윤리적 및 종교적 원칙을 수호하는 권리와 의무를 가졌을 뿐 아니라 그러한 모든 원칙을 구체적인 경우에의 응용을 판단할 일이 있을 때 현대적 면에서도 권위적으로 간섭하는 권리와 의무를 또한 가졌기 때문이다.
■ 다면적(多面的) 행동과 책임
교시와 교육으로부터 사람은 행동으로 건너가야 한다. 자기들의 생활 조건 덕분에 평신도들은 항상 그 종국(終局)이 현세적인 활동과 제도의 형성에 종사하는 만큼 이러한 행동하는 특히 나의 아들들인 평신도들에게 속하는 과업이다.
그러한 고상한 과업을 이행함에 있어 그 소망(所望)의 목적을 효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나의 아들들은 직분적(職分的)으로 자격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직업에 고유한 법칙과 일치하여 자기들의 직업을 영위함이 요긴하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교적 사회 교훈의 원칙과 지침의 범위 안에서 그리고 교회의 권위에 대하여 충성한 신뢰와 효순(孝順)의 태도로써 행동함이 똑같이 필요하다. 현세적 사무의 집행에 있어 그들이 그리스도교적 원칙과 지침을 따르지 아니할 때 그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이 위무를 잊으며 흔히 자기들의 형제의 권리를 침해할 뿐 아니라 그 교리 안에 원래 구비된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교리 안에 진정한 지침력(指針力)이 없는 것 같이 보이게 되는 의혹(疑惑)까지도 일으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