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사)순절 전례 解說(해설)
보속=극기+기도+생활재건
베옷 입고 통회하듯
고해는 미리 서둘러서
발행일1962-03-18 [제319호, 4면]
사순절은 보속하는 시절이다. 우리 신자들은 모두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신자 아닌 자가 보속하는 시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사순절에 40일동안 단식해야만 하였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전쟁 때 우리에게 단식이 면제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지금은 우리가 사순절 동안 매 금요일에만 단식한다. 그러면 보속하는 시절에 대하여 말할 수 있을가? 혹은 현대 사람들은 옛날사람보다 건강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혹은 현대인은 강한 신앙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아니면 현대생활의 조건과 노동의 리즘이 옛날의 준엄한 탄식의 업적을 허락하지 아니하는 것인가
예수의 설교는 『너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왔다』란 말씀으로 시작한다. 란 말씀으로 시작한다. 성서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권한다. 교회는 모든 세기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회개하라고 가르친다. 20세기의 그리스띠아니즘은 교회의 가르침과 전통을 잊어버리려고 하는가 여기 대답할 필요가 있다. 「요나」 예언서에 보면 재와 굵은 베옷을 입고 통회하는 「니니페」 사람들에게 천주께서 용서를 베푸셨다.
그리스도이전 5세기에 <요엘>이란 예언자가 세상에 올 천주의 심판을 묘사하엿다. 그리고 『제소를 거룩케 하며 회를 조직하고 백성을 모으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권하였다. 『주여 네 백성을 관유하소서』하고 용서의 희망에 살게하였다.
천주께서도 회개를 바라신다. 『제소를 지키고 울며 애통함으로써 온전한 마음으로 내게 회두하라』
그러나 어떤 때 누가 죽은 후 상주들이 그토록 슬퍼하지 아니하면서 흰 옷을 입고 있음을 본다. 이와같이 통회의 마음이 없이 예식만 채우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에언자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경고하신다. 유대아 사람들은 조의의 뜻으로 옷을 찢는 습관이 있었다. 마침내 그는 천주의 자비를 고한다. 『저 한번 더 용서하시고 강복을 베푸사 너희로 하여금 주 너희천주께 다시 제사와 술을 드릴 수 있게 하실런지 누 알리오?』 이 질문, 이 가정(假定)이 「니니페」사람들의 그것과 꼭같다. 그러나 <요엘>은 <요나>보다 더 멀리간다. 그는 여기 대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천주께서는 용서하실 뿐 아니라 당신 은혜로 더(加) 오신다. 『보라 나 너희에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보내리니 너희는 그로써 보양 할 것이라』 성신 강림날 베드루 종도께서 처음으로 유대아인들에게 설교하실 때 『요엘 선지경』을 요약해서 『너희들은 회개하고 또 너희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세를 받아라』 고 결론지었다.
사람이 천주를 맞나게 되면 동시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자기를 심판하실 자와 관련이 있음을 믿는다.
그러나 통회를 하기 시작하자 천주께서 인자하신 자임을 발견한다.
회개는 다만 용서이 방법만이 아니고 주님을 감상하는 방향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길이다.
고해성사는 회개의 성사라 불러도 좋다. 성세는 물의 성사이다.
영세하기 위하여 물이 필요하다. 성체는 떡과 술의 성사이다. 미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떡과 술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의 용서를 얻기 위한 성사는 회개가 있어야 한다.
<요나>와 <요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회개는 금욕과 기도와 생활의 개선으로 성립된다. 이것은 모든 고해성사에 적용되거니와 특히 사순절 고해성사에 그러하다.
보속하는 시절은 고해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고해는 새성세와 같다. 주교예절서에 LAVANT AQUAE LAVANT ET LACRYMA란 구절이 있다. 물은(성세) 씻는다. 그러나 눈물(고해)도 씻는다 뜻이다. 고해성사는 더럽히어진 영세때 받은 흰옷을 씻어준다. 사순절미사에 나오는 성세의 테마의 인물들은 성세로 말미암아 가져온 구원의 타이프이나 마지막 시간에 구원된 죄인의 이메이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19세기까지 즉 공식 보속제도를 포기한 후 오랜 세월에 불란서 많은 성당에서 사죄의 예식을 지켜왔다. 오늘 주교좌대성당에서 부활주일 대미사 후 전대사 있는 교황강복을 주교님이 주시는 것이 그 흔적이다. 부활의 의무는 사규성사를 보는 것이다. 즉 고해 영성체 하는 소위 봄 판공성사를 보는 것이다.
부활준비의 고해를 너무 해리(解離)시켜서는 아니된다. 성주간은 특증있는 주간이다. 성주간에 매일 영성체 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적어도 성 수요일 전으로 부활고해성사를 완료했으면 한다. 그것은 부활직전에 장사진을 치고 그렇지 않아도 성주간에 절로 바쁜 본당신부를 고해소의 포로로 받드는 괴로움을 덜어준다는 뜻에서, 그 보담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의 주님의 TRIDUUM SACRUM(성 木金土曜日)을 새 누룩과 함께 마음의 순결 속에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성 木金土요일이야말로 우리가 최고로 성화되어야 할 날이다. 또한 사순절에 집단적인 성찰규명을 함도 좋을 것이다.
여기 예컨대 에제키엘서 성영 119 죄의 사함을 고하는 복음서 고죄경 등 통회의 타이프가 있는 말씀을 이용할 수 있다. 요컨데 부활절과 성신강임절의 기쁨은 통회하는 시절과 고해 성사의 결실이다. 『너희들은 근심하는 빛을 하지 말고 도로 혀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누가 말씀하셨나. 그리스도가 누구에게 제(齊)를 지키는 자에게 왜 이러한 말씀을 하셨나. 재를 지키는 자 가운데는 재 지키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위장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신랄한 풍자적인 묘사이다.
또한 오늘날 재지키는 자들이 극소수이다. 우리는 사순절에 대하여 이야기 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한다. 압박감을 주는 말이다. 어떤 이는 사순절은 기도하고 극기하는 때라고 하는 것을 안다. 신자의 본분의 일부분은 하는 것이다. 조금도 이상한 것이 없다. 이 모든 이에게 교회는 그리싀도의 말씀으로 대답한다. 『너희들은 근심하는 빛을 하지 말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사순절을 슬픈 허장(虛葬)을 계획하는 때가 아니다. 그것은 고도(高度)의 생활을 하는 때이다. 우리는 한 축일을 준비한다. 그것은 모든 이를 위하여 부활이 될 것이다. 기쁨 가운데 보내야 한다. 사순절은 행복에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