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26) 나자렛이라 하는 極地(극지) ③
발행일1962-03-25 [제320호, 4면]
인간이 천주와 닮게 되는 것은 위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천성에 의해서이다.
이때 <샤르르 드 후꼬오>는 전혀 영광이라는 것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수도자의 영광까지도 관계가 멀었다.
그는 경멸을 당하고 욕설과 조롱을 받으신 예수가 걸으신 길을 될 수 있는대로 가까이 이어갔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예수의 또하나의 하인이며, 자기에 관해서는 모욕적인 풍설이 떠도는 것을 듣거나, 사람들의 혐오를 사는 짓을 즐겨한 위대한 방랑자 <성 베네딕트 라아블>과 매우 가까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같은 시대에 또 한사람의 방랑자가 그와 마찬가지로 <성 베네딕트 라아블>을 본받아서 그리스도에게로 다름질 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은 어떠한 신비였을까.
<랭보오>와 <베르테레느>의 친구인 시인 <제르망 누보오>는 1891년에 「비세를」(파리교외의 정신병원)을 나오자 걸인이 되어 파리의 다리밑에서 잤다.
그리고 나서 조금후에 <샤르르> 수사가 나자렏으로 출발했을 때 <제르망 누보오>는 「쌩 뽀오므」 「로마」 「쌩 쟉크 드콩포스텔」에로 대대적인 순례를 시작하고 있었다.
1909년에는 고향인 「쁘리에르」에 가서 거기서 1920년의 부활첨례동안에 고독과 비참 속에서 68세의 한평생을 끝마칠때까지 부랑자 생활을 했다.
<후꼬오>와 <누부오>는 다같이 같은 원망(願望)의 희생이 되고 있었다. 그 원망이라는 것은 조롱과 빈곤에의 정열이며 사람들에게 이 정열을 같이 하도록 하며 『좋은 시대』의 추잡한 사치로부터 몇사람을 끌어내어 자기들과 같이 고독을 행해서 출발하는 고독인 것이다.
과연 <젤망 누보오> 이상으로 나자렏에 있어서의 <후꼬오>의 수수께끼를 더 잘 이해한 자가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은 서로 만나는 행복을 이세상의 저편 천주의 왕국에 있어서 밖에는 맛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세상에서 그들이 나눠서 갖고 있던 것은 다만 하나인 고독이라는 것이었다.
크라라회 수도원 한구석의 오두막집에서 다만 홀로 있을 때 <샤르르> 수사는 천주께 받은 선물의 무한한 위대성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또한 <성 벨나도>의 친구인 <기요므 드쌩첼리>와 같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천주와 같이 있는 자는 자기 홀로 고독할 때 이상으로 고독하지 않을 때는 없다…』
『독방 속에서 항상 신성한 일에만 종사하고 있으면 성스런 시닙와의 유사(類似)로서 또는 경건한 감정이나 안정된 일의 유사로서 하늘이 매우 독방에 가까워진다….』 『독방은 신성한 장소이다. 거기서는 주인도 하인도 친구들처럼 빈번하게 말을 주고받는다』
독방은 왕자의 방이다. 시편도 이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성 벨나도>는 어느날 감격에 넘쳐 몸을 떨면서 그 비밀을 고백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잠시동안 즉 약30분동안 하늘에는 침묵이 가득차고 영혼은 숙망의 포옹속에서 고요히 쉰다. 아마도 영혼은 잠들고 있었을 것이나 마음은 깨어있다. 왜냐하면 영혼은 마음을 통해서 이동안 진리의 비법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후 영혼은 자기에게 돌아왔을 때 그의 기억을 그것으로 풍부하게 할 것이다.
또 그곳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보이며 인간에게는 표현이 허락되어 있지 않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들어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밤이 밤에게 가르쳐 주는 이러한 침묵의 모든 것 보다 우월하여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비밀은 그곳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도 여전히 최후적인 것이여서 수도자는 그것에 정통하는 일은 없다. 사람은 천주의 현존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시기에 갈멜수도원에 은수하고 있던 리쥬외의 성녀 <데레사>도 1895년 6월 14일에 단한번 이 깊은 환희를 알았을 뿐이었다.
<샤르르 후꼬오>는 한번도 이것을 경험해본 일이 없었을까. 수도원의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샤르르> 수사의 오두막집은 은수자의 독방인 것이다. 신바가들의 독방의 수수께끼는 나자렏의 집의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운데 다볼산은 짧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곳에 인류의 텐트를 세울 때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신적인 혜택까지도 그 자체를 위해서 채워져서는 안된다. 천주의 은혜가 아니라 천주 그 자신을 원함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투명상태가 아니면 안된다.
그당시 믿을 수 없는 금욕에 살고 있던 <샤르르> 수사는 고행의 뜻을 둗고 있다. 그는 또 천주께 그 미(美)를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구를 하였으나 즉시 그는 생각을 돌려서 그리스도의 입으로 다음과 같은 항의를 하도록 한다. 『네게는 그 미를 알 필요가 없다』 필경 이 말 이상으로 <후꼬오>의 영혼을 보다 깊게 빚어주는 것은 없었으나 밤의 한줄기 빛에 의해서였다. 그의 의복이나 숙소와 마찬가지로 그의 말도 미를 멸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영혼의 성(城)을 깨우쳐 주는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화려한 문장이나 천주의 심연에의 신비적인 침잠(沈潛)을 미끈하게 묘사한 <루이스불록크>의 문장은 한줄도 없다. 그의 문장에는 십자가의 성 요왕을 위대한 시인으로 한 사막과 밤의 저 엄숙한 미까지도 볼 수 없다.
이 1897년이라는 해에는 18년전에 <성 벨나도>가 임종할 때 이렇게 부르짖은 것을 <샤르르> 수사가 알기에는 너무나 일렀다.
『아니, 아니 위안이 아니라 힘과 인내를!』
이와같은 해인 1897년에 성녀 데레사는 리쥬외의 갈멜회 수도원에서 임종에 가까워 있었다. 그러나 <샤르르> 수사는 그 수녀의 존재까지도 몰았었다. <데레사>는 17세에 갈멜회 수도원에 들어가 십자가의 성 요왕이나 <슈당> 신부의 저작을 탐독했다. <데레사>는 「루우당」의 예수회 신부가 번역한 『그리스도를 본받음』의 다음 말의 주석을 몇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다.
『고뇌를 끌어 안아라, 그리고 위안에 관해서는 천주의 성의에 맡겨라』 <샤르르> 수사는 나자렏에서 이렇게 썼던 것이다.
『나는 예수께 위안을 요구하지 않는다. (첫째로 내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혹은 그를 나의 마음 속에 느끼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 되며 따라서 그것은 대게 있어서 천국도 될 수 있을터이니까. 그러나 사람은 이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자기의 천국을 만드는 것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황홀을 기대하지 않고 일찌기 시리아에서 그가 소원을 이루지 못했던 피의 희생을 기다리고 있다.
1897년 6월 7일 성신강림 첨례날 그는 자기만을 위해서 다음 문구를 기록한다.
이말은 그때 이래로 항상 그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땅위에 엎드려져 알몸으로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없게 피와 상처로 범벅이 되어 처참하게 살해된 순교자로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것이 오늘이기를 희망해라』
이듬해 가을 11월 5일부터 15일까지 <샤르르> 수사는 피정신공을 시작했다. 이미 6개월 이상이나 저와같은 은둔과 극기의 부단의 기구로 살아온 사람이 그 이상의 것을 자기에게 부과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길이었다. 그는 성당과 오두막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절대적 침묵 속에 머물렀으며 기구와 묵상을 끄치지 않았다. 그가 쓴 것은 인쇄하여 76페지나 되는 긴 것 그와 천주와의 가장 비밀한 대화를 요약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아닌 모든 것을 부셔없애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천주께 말을 시킨다.
『너를 위해 이곳을 사막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곳에서 너는 성녀 <막다레나>가 가막에서 나와 함께 완전히 혼자 있듯이 나와같이 다만 홀로 있어라. 네가 그곳에 도착하는 것은 해탈(解脫)에 의한 것이며 모든 잡념을 쫓아버리는데 있는 것이다. 이 잡념이라는 것은 그 자신으로서는 나쁘지 않으나 아침저녁으로 나를 생각해야 되는데 나중에는 아침 저녁으로 네 마음을 내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비설(神秘說)의 근저(根底(를 이루는 것 그것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천주의 뜻을 일보 일보 행하는 것이다. 인간이 실제로 변모 하는 것은 산상의 수훈(垂訓)에서 고하신 『진복』(眞福)에 의한 것이다. 이 순간 <샤르르> 수사는 특별히 『마음으로 가난한 자는 진복자로다. 저들은 천주를 볼 것이다.』하는 위대한 잠언(箴言)을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것은 단순히 순결하게 살고 있는 자만이 아니고 자기 욕망에서 하나하나 따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나 그것이 모이면 정신의 강맥(講脈)을 흐리게 하기에 충분한 보잘것 없는 것들의 무더기를 쫓아버리는 것을 말한다.
전에 <샤르르> 수사는 나자렏에 가려고 열망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원하고 있던 곳에 있다. 거기서 그는 원하고 있던 생활을 하고 있다. 원하고 있던 모든 빈곤에 충만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또다시 자기 자신을 끊어버리려고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