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사)순절 전례 解說(해설)
「빠스카」로 향하여
맑은 공기를 마시고자
죽음과 부활에의 초대
발행일1962-03-25 [제320호, 4면]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루가 18,1-34) 사순절이 시작하는 전주일에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읽는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다. 사순절은 빠스카 첨례를 준비한다. 주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 처럼 그것은 수난과 부활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가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그는 특히 빠스카 오순절 장막절 이 삼대 유대아사람이 축일을 지내려 거기 올라가셨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하나의 순례요 천주께로 향하는 걸음이었다.
사실 예루살렘은 고지(高地)에 위치하고 있는 고로 그 길은 산길이었다. 올라가는 동안 성영을 읊었다. 순례자는 산길을 걸어가는 동안 자기 영혼을 천주께로 들어올려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었다. 예수께서 가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이번은 마지막 길이었다. 전에는 순례자로 올라갔으나 이번에는 구원의 사업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올라가시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 여러가지 있었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예리고」를 통하여 지나가셨다고 그가 마지막 여행때 취하신 길을 주의해서 말씀하신다. 「예리고」는 헤브레아인들이 사막에서 40년동안 살은후 약속한 땅에 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만난 도시이다.
모이서는 멀리서 「예리고」를 보았다. 그는 「네보」산에서 죽었다. 천주께서 그에게 약속의 땅을 보여주셨다. 그의 앞에 광대한 풍경이 전개되었다. 그는 _단을 __에 보았다.
「욜단」 그 위가 약속의 땅이오 바로 「욜단」 가까이 「예리고」가 있다. 모이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참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고자 하셨다. 그는 모이서가 머물던 거기서 다시 걷기 시작하셨다. 「예리고」는 얕은 지대에 위취하고 있는 도시이다. 「예리고」가 건립된 「욜단」과 사해(死海)의 단층(斷層)은 지구상 가장 얕은 곳이다. 이 지방의 땅은 해발(海拔) 4백 메타 이하가 가까웠다.
우리는 마치 심연에 내려가는 인상을 받는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출발할 때 외우는 『주여 나 깊고 그윽한 곳에서』의 이성영은 여기서 지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천이백 메타의 높이가 「예리고」와 예루살렘을 갈라놓는다. 길은 끈 힘 없이 오르기만 한다. 그렇다. 사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우리는 성전을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종도들과 순례자들은 수세기부터 모든 백성의 기개(期待)를 들어내던 성영 129를 읊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입에서 발하는 같은 말씀은 새로운 뜻이 있었다. 즉 그는 구원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것이었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걸어갈 때 성영 125의 아래구절을 읊었다. 『눈물중에 씨 뿌리는 자들은 용약하며 거두겠나이다. 뿌릴 씨를 들고 갈면서 그들이 통곡하며 가고 있아오나 저희 곡식단을 들고 돌아올 때에는 그들이 용약하며 돌아오겠나이다.』 순례자들은 진심으로 노래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농사를 지었다. 그들이 심다 거두다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노래하셨다. 그래서 그말은 다른 뜻이 있었다. 예수님은 땅에 뿌려질 씨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죽을 것이다. 그는 죽은 자 중에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높이 매달 것이다. 그의 어머니와 종도들은 체읍할 것이다. .그러나 죽으신 후 삼일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실 것이다.
즐거움은 추수할 때 보다 더할 것이다. 눈물 중에 씨 뿌리는 자들은 용약하며 거들것이라고 한 이스라엘의 이 옛구절은 새로운 뜻이 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께서는 지상도시가 아니고 천상 예루살렘인 천국의 도시에 넘치는 권리로 들어가기 위하여 대(隊)를 지워 당신 발자욱을 밟고 가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보셨다. 사순절은 해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그 발자취 속에 우리를 다시 살게한다. 주께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종도들은 그가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을 못알아들었다.
그럴지라도 그의 죽음을 고하는 표가 많다졌다. 사순절 끝에 읽는 복음은 세력있는 법률학자 클럽의 원한이 증가한다고 말한다.
미움이 더한다 이것이 처음엔 엄밀히 들어났으나 마침내 폭력으로 화하기까지 나간다.
그러나 동시에 서간경에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약의 이야기 중 몇개를 읽는다.
형제로부터 팔린 <요셉>은 그들의 구원자가 된다. <엘리아>와 <엘리제>는 죽은자들을 일으킨다. <다니엘>은 혹독한 죽음에서 천주로부터 구원된다.
우리는 이 「드라마」를 다만 역사를 읽음으로써만 새롭게 하지 아니한다. 우리는 친히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에 초대되었다. 우리는 사실상 「빠스카」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사막끝에 복지가 있다. 영세지원 기간후에 성세성사가 있다, 고해성사는 천주와의 우정으로 인도한다. 이 모든 길 위에서 우리는 눈물 중에 씨뿌리는 자들은 용약하며 거들 것이다.
한 성영을 읊을 수 있다. 사순절 가운데 우리의 전생황릉 요약(要略)할 수 있다. 헤브레아인들은 40년동안 사막에서 살았다. 그러나 우리의 전생활은 약속의 땅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성세를 받았다. 으러나 우리의 영세가 완성되기 위하여 육신의 부활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에만 우리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사순절은 보속하는 때다. 우리는 죽을때까지 죄인이다. 고해성사를 봄으로써 천주께 충실하고 우정을 보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겠느냐. 사막에서 복지로 나아가는 걸음 죽음에서 부활 회개 이런 것이 우리 생활의 신비를 들어내는 「이메이지」이다.
더 좋은 조건을 향해 동경하는 생활이다. 예수님의 생활을 모델하는 생활이다. 그렇다. 우리는 「빠스카」를 향하여 걸어간다.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오늘날 등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늙은이도 젊은이 대열에 기어 올라간다. 그들은 캠프생활을 한다. 평안한 생활이여 안녕! 그러나 그들은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즐거운 마음과 자유로운 정신으로 떠난다.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일찍 일어나고 음식을 조금 작만한다. 술을 마시지 아니한다. 걷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말도 하지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다. 숨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느리고 항구하고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피곤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근심하는 빛이 없다. 행복은 다만 산꼭대기에만 있지 않다. 노력 가운데 산경치 가운데 벌써 있다. 사순절도 이와같다. 엄격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천주의 산을 향하여 자유로운 걸음을 하기에 필요한 조건이다.
우리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즐거히 출발하기 위하여 약간의 안락을 버린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