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안 23세 성하께서는 한국에 3대주교구(大主敎區)는 각 대주교구에 소속되는 자치의 완전한 교구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서울 대구 광주 등 3대주교구의 각 소속교구를 결정하였다.
즉 서울대주교구에는 평양교구 함흥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및 인천교구가 소속되고 대구대주교구에는 청주교구와 부산교구가 소속되며 광주대주교구는 전주교구를 각각 속(屬) 교구로 하여 3대주교구의 정립(鼎立)을 실현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바오로 노(盧基南) 대주교 요안 서(徐正吉) 대주교 그리고 하롤드 헨리 현(玄) 대주교이 승진(昇進)을 보게된 것이다.
바티깐 성청 발령에 의하여 대주교구로 승격(昇格)되는 서울, 대구 및 광주의 대주교구는 교회법(敎會法)이 규정하는 완전한 수부(首府 METROPOLITAN)가 되며 승진되는 대주교 또한 교권(敎權) 상의 완전한 권한을 관장하게 되는 것이다. 소속교구가 되는 각속교구(各屬敎區)는 각 대주교구의 관하에 들어서는 동시에 대목교구에서 완전한 자치교구(自治敎區)로 승격하여 속교구의 주교들은 대목(代牧) 주교에서 본교구 주교로 승진하게 된다.
이같은 성청의 바령은 그 체제(體制)에 있어 국제적인 독립국의 면목을 보장하고 한국 가톨릭의 장래를 확힌하는 교황성부의 자부(慈父)적이며 과감한 처사에 기인한 것이다. 국내의 소식통 및 지도적 신문 등은 이의 보도와 아울러 대한민국의 국위(國威)를 다시한번 선양(宣揚)한 사실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한편 공석중인 주한교황사절의 직무를 대리한 <찰스 B. 무튼> 몬시뇰은 이 소식을 각 대주교에게 전화 · 전문으로 전달하고 이어서 아래와 같은 주한교황사절관 통고문을 발송하였다. 동 라띤어 원문(原文)은 다음과 같다.
■ 駐韓敎皇使節館 通告全文
교황 성부 요안 23세께서 한국교회 계끕을 설정하시고 여러 주교님들에게 통지하도록 명령하셨읍니다.
대주교구와 그의 소속교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서울(교회)관구
▲서울대주교구(前서울감목구) 교구장 바오로 노기남 대주교(재속성직자)
◇소속교구◇
▲평양교구(前평양감목구) 교구장 방지거 홍용호 주교(재속성직자 ·피납치자) 교구관리자 죠지 케롤 몬시뇰(北美外邦傳敎會員=메리놀회)
▲함흥교구(前함흥감목구) 교구장 公席 교구관리자 티모테오 빗델리 몬시뇰(오딜리아 성분도회원)
▲춘천교구(前춘천감목구) 교구장 토마스 귄란 주교(성고롬반 전교회원)
▲대전교구(前대전감목구) 교구장 아드리아노 라리보 주교(파리외방전교회원)
▲인천교구(前인천감목구) 교구장 윌리암 J. 맥나흐튼 주교(北美外邦傳敎會員=메리놀회)
②대구(교회)관구
▲대구대주교구(前대구감목구) 교구장 요안 서정길 대주교(재속성직자)
◇소속교구◇
▲청주교구(前청주감목구) 교구장 야고버 빈센시오 파디 주교(北美外邦傳敎會員=메리놀회)
▲부산교구(前부산감목구) 교구장 요왕 최재선 주교(재속성직자)
③광주(교회)관구
▲광주대주교구(前광주감목구) 교구장 하롤드 W. 헨리 대주교(성골롬반전교회원)
◇소속교구◇
▲전주교구(前전주감목구) 교구장 베드루 요셉 한공열 주교(재속성직자) ⊙오딜리아 성분도회원인 티모테오 빗뗄리 몬시뇰은 덕원면속수도원장 교구 (前덕원면속수도원장교구)의 교구관리자의 직위를 보지(保持)할 것임
이것은 1962년 3월 25일자로 로마 『옷세르 바또레 로마노』지(紙)에 발표된 것입니다.
주한교황 사절 직무대리 찰스 B. 무튼 몬시뇰
■ 盧 大主敎
다같이 누릴 큰 영광
盛大한 任命式 豫想
全國主敎 다 모일듯
노주교님을 방문한 본기자는 우선 축하방문객의 쇄도에 놀랐다.
7층 「그라스 삘딩」 성모병원 꼭대기에 자리잡은 노주교님 방은 축하 방문객으로 법석을 이루고 연달아 「에레베타」가 숨가뿌게 오르내린다.
금년에 환갑을 맞이하였고 백발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한 노(老?) 대주교께서는 이날따라 극히 건강해 보이며 더한층 즐거운 표정이시다.
얼마를 기다리다 만나뵈었드니 『멀리 서을 필요야 뭐 있느냐?』고 즐거운 나무람(?)의 말씀을 먼저 던지면서 반갑게 마져주셨다.
정부측에서는 아직 축하의 방문이나 전문이 없다고 하시면서 책상 위에는 각 교구 성직자 신자들로부터 나라온 축전이 십수통 쌓여있었다.
『성대하게 한자리에 모여 임명식을 거행하여 모든 일반신자들과 함께 영광과 즐거움을 나누겠다』고 노대주교께서는 우선 신자들에게 먼저 이 영광을 같이 누릴 뜻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기자에게 던져주셨다.
『내 개인의 영광보다도 한국교회 전체의 영광을 우선 기뻐하여 마지 않는다. 전교지방을 벗어나 교직체계(하이에라키)로 승격되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이후의 한국교회가 질머질 중대한 책임일 것인줄로 안다.
일본만 해도 벌써 대주교가 나왔고 추기경까지 나왔으므로 보아 신자수가 더 많은 한국이 이제 대주교가 설치되었다는 것은 좀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성하께서 이번에 특별히 한국교회에 영광을 주신 것에 대하여는 감사하여 마지않는다.
50만 전국 신자와 더불어 이 영광과 이 기쁨을 같이 하기 위하여 성청에서 정식 임명장이 도착하는대로 전체 주교 합석리에 성대하게 임명식을 거행하여 천주 성모께 감사를 드리고 교황 성하의 뜻을 받들어 우리 한국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더욱 매진할 것을 다짐할 것이다.』
盧大主敎 略歷
▲1901년 12월13일 평양에서 출생 ▲1917년 천주교 대신학교 예과 입학 ▲ 1923년 예과 수료와 동시에 본과 입학 ▲1930년 본과 전과정은 수료 ▲1930년 신부로 서품 ▲1930년 명동천주교회 근무 ▲1941년 천주교 서울교구장 임명 ▲1943년 12월 주교로 성성 ▲한국 주교단 의장 ▲1960년 뮨헨 만국성체대회에 참석 ▲1962년 4월 서울대주교구장 및 대주교로 피명
■ 徐大主敎
더욱 분발해야 할 일
祝賀客은 줄을 이어
感恩의 「떼 데움」 드리며
본교구 및 대주교위에의 승격 통달을 24일 밤중에 받으신 <요안> 서대주교님은 희색이 만연했고 주교관내 성직자 및 직원들의 축하인사를 받기에 바빴다.
이 희소식은 곧 시내 각 본당에 통지되어 다음날 아침 주일미사는 감사기구로 기쁨의 도가니를 만들었다.
로마에 유학중인 신부, 수녀, 신자들과 대전, 광주 등지서 온 축하전문을 손에드신 서대주교님은 축하예방객에 한결같이 『이젠 더욱 분발해야 한다.』고 인사에 대신하셨다.
『갑작스런 일입니다. 한민족(韓民族)의 진복을 위한 순교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포교애혼지 2백년만에 3개교구가 대주교구로 나머지 감목구가 본교구로 승격됨은 최대의 경사입니다.
그러나 본인이 대주교로 승격 · 임명됨은 천만의 의의 일이어서 실로 공축과 두려움을 금치 못합니다.
천주의 부르심이요 12종도의 후계자로서의 근간적(根幹的) 복음정신에 입각한 영복증진에 주교각하 및 신부 · 수도자 제위 교형 여러분과 함께 매진할 각오입니다.
교구내 18만 신자 여러분은 순교정신에서의 모든 본분을 열렬히 이행하며 더욱 분발하여 대구교구로서의 발전에 기여해 줄 것을 기원하여 마지 않습니다.』
徐大主敎 略歷
▲1911년 5월 1일 경남 울산군 두서면서 탄생 ▲1926년 9월 14일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입학 ▲1934년 6월 15일 동교 철학과 졸업 ▲1938년 6월 11일 동교 신학과 졸업과 동시에 신부서품 ▲동년동월 12일 대구교구 화원본당 주임 피명 ▲1940년 8월 3일 대두교구 부산시 청학본당 주임 전임 ▲1942년 10월 27일 대구교구 유지재단 이사로 선임 ▲1943년 3월 5일 대구교구 부산진 · 동래본당 주임 피명 ▲1945년 1월 5일 대주교구 전부산시내본당 주임 피명 ▲동년 12월 15일 대구교구본부 경리부장 전임 ▲1947년 대구교구 상주본당 주임 전임 ▲1948년 8월 1일 대구교구 계싼본당(주교좌)부임 피명(교구평의원 피명) ▲1954년 7월 6일 대구교구 경남지구감목대리 피명 ▲1955년 7월 13일 교황님으로부터 대구감목구 주교로 임명 ▲1955년 9월 15일 대구감목구 제6대감목으로 주교위 성성 ▲1962년 3월 25일 대구(교회)관구장 및 대구대주교로 승격.
■ 玄大主敎
한국내에서 가장 활동적이며 정열에 넘친 주교의 한분으로 알려져 있는 현대주교께서는 1932년에 한국으로 입국한 10명의 「콜롬바노」회원중의 선봉자이다. 11세때에 「루터교」 신자인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이 가톨릭신자인 미망인과 재혼하자 이때부터 위대한 가톨릭 선교사로서의 첫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루터교 신자인 양친 밑에서 1909년에 태어나 1922년 나이 13세때 가톨릭교회를 알게되어 견진성사도 받기전에 「오마하」 근처의 「콜롬바노」 신학교에 들어갔다.
어린시절부터 축구 선수로 활약했고 패기에 언제나 넘쳐있는 현대주교는 1932년에 신품받고 중국으로 가게되었다.
그러나 중국으로 향하는 도중 일본의 「고오베」에 기착했을 때 중국행이 취소되고 한국으로 가도록 명받았다.
2차대전중에는 구라파 주둔 미군사단에서 30개월을 종군ㅅ신부로 활약하여 그 용맹에 대하여 동성훈장(銅星勳章)을 수여받은 후 제2의 고향 한국으로 다시왔다.
1950년 6·25동란이 이러나자 「콜롬바노」회 지부장 <브레난> 몬시뇰을 위시하여 4명의 신부가 사망하고 2명이 행방불명되었고 일반신자 4백명이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잃었다.
교세적으로 황폐해진 이 교구를 도맡다 현재까지 재건해놓은 분이 바로 이번에 대주교로 승계한 현대주교인 것이다. 현대주교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09년 미국 「미네소타」주 「노스필드」에서 출생 ▲1932년 신부로 서품 ▲193년 선죠사로서 한국입국 ▲1935년 전남 나주본당 주임 ▲2차대전으로 구라파 종군신부로 종군 ▲1947년 종전후 한국 재입국 ▲1950년 괴로군에 살해된 <브레난> 몬시뇰 후임으로 광주 지부장으로 피명 ▲1957년 5월 11일 주교로 성성 ▲광주교구장 ▲1962년 3월 25일 광주대주교구장 및 대주교 피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