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에 떡을 가지지고 사례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더라』(요왕 6,11)
철들지 않은 어린 딸에게 어떻게 하면 식사때의 기구를 감명깊게 가르쳐주어 빼먹을 수 없도록 할 것인가를 고심한 끝에 다름과 같은 묘안으로 이 교육에 성공했다는 한 어머니의 열심한 정성이 있다. 마침 매일같이 이 집을 걸식하는 한 노인이 있었다. 어느날 부인은 이 노인에게 자기가 준 음식을 먹은 후엔 아뭇소리 말고 나가버리라고 지시해놓고 어린 딸애가 보는 앞에서 걸인에게 음식을 주었다.
허기진 노인이 음식을 성급하게 말아 삼키곤 시키는대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나가버리자 그의 무례한 행동에 화가난 딸애가 고마워 할 줄 모르는 그따위 얌체에게 다신 밥주지 말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기회에 어머니는 식탁에 앉아 음식을 주신 천주님께 한마디 사례없는 무례함을 비교해서 그 노인의 행동과 무엇이 다른가를 지적했을 때 그 딸에는 천주께 대한 자기의 무례를 진실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음식 때의 기구』 얼핏 생각하면 강론으로 들고 나서기엔 너무 자질구레한 명제같은지 모르나 천주를 믿고 그를 경배하는 신자들이 『일이 좀 바빠서』 『생각이 좀 복잡해서』 혹은 『무심결에』 얼마나 많이 이 식사때에 기구를 권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또 우리의 신심은 크고 어마어마한 역사보다 우선 작고 세밀한 생활중의 한 습관에서 더 차근히 증명되고 또 이러한 작은 습성이 우리의 신앙에 영향하는 바를 헤아려 볼 때 결코 사소한 것으로 밀어치울 수는 없다.
오늘복음에 예수께서 많은 사람을 먹일 보리떡 다섯과 물고기들을 허락하신 천주께 먼저 감사를 드려 음식 전의 기구를 몸소 시범보이신 것이다. 물론 음식때 기구를 잊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식때 기구를 하지 않음은 부당한 것이며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신자들에게는 음식때의 기구 그것이 온종일을 통해 천주께 드리는 기구의 전부가 될 때가 많다.
이런 사실이 더욱더 그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 성경말씀을 머리에 그려보자 여기 예수를 따르는 5천여명의 사람들이 사흘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못한채 예수의 강론을 들었다. 예수는 그들의 배고픔을 아시고 먹을 것을 찾아보았으나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두개와 물고기 다섯마리 뿐이었다. 예수께서 여기에 기적을 베푸시어 그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수 있도록 떡과 물고기를 늘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먹이시기 전에 천주께 감사하셨다.
오늘날 천주께서는 5천명이 아니라 몇십만 몇백만 기아에 시달리는 지상의 목숨을 내려다 보시고 계신다. 더욱이 6·25의 참전을 겪은 우리의 소매자락에는 아직도 빈곤과 참변의 냄새가 가시지 않았고 헐벗고 배고픈 사정은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느끼는 우리들이다. 전선에서 보급이 끊어져 굶어죽은 우리국군의 참사만이 아니고 길가에서 배고파 굶은 사람들도 허다하던 그 참변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있는 것이다. 굶다 못해 절도를 하고 그러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땅에서 비록 다행하게 굶지 않고 배불리 먹는 우리들이다. 배고프다고 울부짖는 애기의 울음소리에 줄 것이 없다는 어머니의 처량한 통곡을 듣고 계시는 천주께서는 역시 먹을 것이 있으되 감사할 줄 모르는 나와 너를 굽어 보고 계신다. 배고파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먹는다. 우리가 그들보다 낫거나 별난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어떤 공적 때문에 더 축복을 받아야 했는가를 생각해야겠다. 우리는 음식 때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
이제 구체적으로 그 연유를 열거해본다. 음식때에 감사함은 우선 지성적(知性的)인 일이다. 짐슴들과는 달리 사리깊은 지성에 사는 사람들로서 사리를 따질 줄 아는 얌치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뻔한 소리로도 음식을 마련해 주시는 천주의 은공을 잊는것은?
둘째로 그것은 하나의 예의(禮儀)다. 감사하다는 마음 없이 우리가 애써 번 음식을 야곰야곰 먹어치우는 객손의 무례함을 비교해서 이해가 가는 일이다.
셋째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천주께로부터의 더 풍성한 은혜를 약속하는 계약행위다. 한사람이 어떤 타(他)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되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 도무지 감사할 줄 모른다고 하자. 그토록 무례한 인간에게 두번 다시 인정을 베풀 염두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내 힘이 닿는데까지 도웁고 일해주고 싶은 심리는 천주께도 마찬가지다.
넷째로 그것은 건강에 유익한 일이다. 삶은 가끔 걱정에 몰리고 불안에 쉽싸이기도 하는 때문으로 우리는 근심스럽고 지치고 동요되고 분노한 채 음식을 맞우하기는 한다. 그런 상태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소화에 해된다. 잠깐 마음을 정리하고 신경을 진정시키고 안도와 편안을 수습해서 술을 든다면 다소 차이진 혜택을 예기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배고픈 5천명을 먹이기 위해 영적을 행하셨음 같이 바로 우리 안전(眼前)에서 매일같이 우리 배고픈 군중을 위해 영적을 행하신다. 들판에서 자라는 한포기의 벼를 뽑아봐도 그것은 수천수백으로 증가할 기적적인 씨앗의 발표가 보인다. 이런 모든 것을 헤아려 볼 때 습관된 기구에 익숙한 사람은 뜻을 더해 열성있는 기구를 드릴 것이며 소홀이 했다면 모든 다른 큰 일을 계산하기에 앞서 우선 이런 적은 정성에서 참다운 성의를 자상히 표시할 수 있고 감사하는 사람이어야 하겠다.
아멘.
李鍾淳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