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100) 부산 東萊(동래)본당
佛敎思想(불교사상)이 영향주는 곳
피난 온 金忠務(김충무) 神父(신부)가 세운 본당
순교자 후손이 천주교 모르니
발행일1962-04-01 [제321호, 3면]
지금은 부산시(釜山市)의 일부가 되었지만 부산에 인접한 위성도시(衛星都市)로서 옛날에는 부산까지를 통칭(通稱)하여 동래(東萊)라 불리워졌던 만큼 이 지방은 옛고을(古邑)이다.
본시 부산진(凡一洞)본당 관하의 한 공소(公所)였던 이 지방에 성당이 건립되고 본당으로 승격된 것은 1·4후퇴 작전의 덕분이라 하겠으니 이곳(福泉洞)으로 남하(南下) 피난하신 <글레멘스> 김(金忠務) 신부님이 이곳 공소에 여러해 머물게 되는 동안 미군(美軍)의 물자원조를 얻어 1954년 11월 건평 64평 되는 성당을 지었다.
본당의 행정구역은 동래구의 전체와 양산(梁山)군의 일부 지방이 관하에 들게 되는데 현재 6개처의 공소(公所)가 있고 신자수는 본당 아래 약1천5·6백명 공소교우가 4백내지 5백명 정도로서 도합 2천여명이다.
본당의 사업체로는 『모심(母心)유치원』 (원아 50여명)이 있고 신자들의 사도직(使徒職) 단체로는 「레지오 마리에」4개 쁘레시디움과 「성모회」와 고등학교 재학생들로 조직된 「학생회」와 여자노인들로 구성된 「방지거회」 등이 있다.
본당창설의 공로자인 <글레멘스> 김신부가 1957년 진해(鎭海)본당으로 전임한 뒤를 이어 <야고버> 이(李泰俊) 신부님이 약4년간 계시는 동안 현재 사제관 겸 신자들의 집회소 및 교회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는 2층건물을 신축하였고 지난해 (1961년) 7월에 구마산본당으로부터 이곳으로 부임되어 오신 <아오스딩> 김(金俊필) 신부님이 현재 이 본당의 주관자(主管者)로서 교세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고 계신데 당면한 과제는 성당이 협소하기 때문에 성당을 크게 새로 지어야 하는 문제로서 김신부님의 생각과 말씀은 언제나 모든 것을 성당 신축문제와 관련을 시키신다.
『글쎄 「원동」에 있는 토지문제만 하더라도 나는 성당 짓는데 다소간 도움이 될까 기대했던 것이 그렇게 되고… 교우들의 생활상태는 가난한 이가 많아 자기네들의 그날그날 생활에도 걱정이 너무 많은데…』
인심은 순박하나 지방적으로 발전의 여지가 별로 없는 소비도시로서 교우들은 대부분 피난민과 가난한 소상인(小商人)들로서 본당의 경제적인 유지면에는 애로가 많다.
「임모회」수녀 두분이 유치원과 부락마다 출장하여 교리를 가르치며 전교하는 일을 맡고 있고 아동교리는 매주일 신부님이 직접 가르치신다.
요즈음은 온천(溫泉)장으로 많이 알려지고 있지만 동래본읍은 옛고을로서 묵은 문화의 전통이 억센 곳으로 유력한 지방인사는 거의 불교신자이며 불교사상이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거금 1백년전 <안또니오 다벨리> (安) 주교가 경상도지방을 몸소 전교하실 때에 동래지방에 많은 신자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또 이 지방에는 옛날 순교자들의 무덤이 몇몇 곳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목자없이 또 무서운 박해의 피바람이 계속된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순교자들이 후손이라 일컬으는 사람들이 그들 조상이 신봉하고 목숨을 바친 가톨릭 신앙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안타까운 형편이라 몇해전 이곳 교우들이 옛순교자의 묘지로 인정되는 몇몇곳을 순례갔더니 때마침 그 조상의 성묘(省墓)를 왔던 후손들이 천주교 신자들이 자기네의 조상을 존경하는데 대해서 감사하면서도 알아듣지 못할 일이라고 이상히 생각하드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본당의 주일미사는 아침 6시30과 10시30분 두 차례 있고 평일에는 6시에 미사가 거행된다. (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