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27) 나자렛이라 하는 極地(극지) ④
발행일1962-04-01 [제321호, 4면]
1898년 1월 6일 그는 장문의 편지로 <유브랑> 신부에게 자기의 행복과 고뇌를 피력하고 있다. 『나의 생활은 깊은 평온에 잠겨있다.』고 그는 쓰기 시작했다.
『낮에 환할 때에는 일하며 아침과 저녁, 그리고 밤의 일부분을 독서와 기구에 보내고 있읍니다.』
그러나 뒤이어서 그는 대단히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나의 고백의 근본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즉 미즈근함(충분히 잘되지 않고 있는 기구, 충분히 잘 외우지 못하고 있는 성무일과 가련하게도 충분히 잘 참례 못하는 미사, 하루종일 충분히 보존하지 못하는 천주의 현존 등), 비겁함(기상할 때의 태만…… 때때로 나는 최초에 잠이 깼을 때 일어나지 않고 또다시 자고 만다) 대식(大食) 폭식(과식) 애덕의 부족(이웃사람을 위하여 충분히 기구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속에 들어있는 우리주를 보는 숩관 천주의 아들을 보는 습관이 충분히 되어있지 않고…… 애덕과 반대되는 생각, 전에 사귀던 이런 사람, 저런 사람에 대한 엄격한 비판을 포함한 회상). 오만(자기를 낮추는 감정이 부족하고 자기에게 대한 불신이 부족함) 잘난체 하는 감정에서 생기는 원의(願意)와 사상, 과거와 현재의 자기의 잘못을 충분히 통회하지 않으며 천주께 대해서도 인간에게 대해서도 감사가 부족하다는 것, 이러한 것들이 주요한 점들입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미지근함과 비겁함입니다……』 『하나의 교만한 생각이 상당히 빈번히 나를 괴롭혀줍니다. 즉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있었더라면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라던가, 2년 후에는 수도워장이 되어 있었을 것이라던가, 천주의 성총의 도움을 입어서 그 위치의 덕택으로 수도자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라도, 그 주위의 민중의 성화를 위해서도 대단히 알맞는 저 「악크베스」의 작은 수도원에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가 있었을 것을 하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유혹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역시 유혹은 실재합니다… 나는 거기에 나를 괴롭히려고 하는 혹은 적어도며칠동안 내마음을 분산시키는 악마의 책략을 봅니다…… 그래서 나는 악마에게 대답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보내고 있는 생활은 우리주께 있어도 30년간이 요했다. 어째서 내가 이 생활을 불만하게 생각하랴”하고…』
이 여러가지의 작은 죄는 우리에게 미소를 띠우게 한다. 그러나 은수자의 오두막집을 비치는 신성한 광선 속에서는 공간에 날라 다니는 작은 먼지까지도 눈에 띄어서 공기의 순수한 투명성을 흐리게 한다. <샤르르> 수사가 그 험악한 길을 가면 갈수록 이제부터 올라가야 할 산봉우리가 얼마나 높은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절정에는 절대청등(絶對靑燈)의 정기가 충만하고 있다. <샤르르> 수사는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한탄하고 있으나 크라라회의 수녀들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될 수 있는대로 단식이나 철야 모욕될 만한 것에 대한 정열을 감추고 있었으니 수녀들은 여러가지 일을 보이 그것을 알아 채리고 있었다.
<쌩세르> 원장은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부 알고 있었다.
이 은수자와는 울타리로 격리되어 있기는 하나 원장은 그를 친밀하게 알고있었다. 때때로 원장도 그를 수도원의 실로해서 응접실까지 불러들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두마디, 세마디씩 말을 주고 받았다. 한번도 그들은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그는 기구하기 위하여 약간의 자유로운 시간이 필요하다고 원했다. 수도원장에게도 그것이 무엇보다도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너무 일할 것을 주지않도록 주의하고 있었다.
그는 사막의 사부(師父)들보다 많이 먹지는 않으면서 노동자와 같이 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인간의 힘을 지나치게 믿고 있으나 크라라회의 수녀들은 그를 애끼고 있었다.
나자렡에서 그는 오히려 제2의 수련기간을 가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이미 그가 1896년에 회측을 마련한 「예수의 작은형제」로서의 수련이었다. 실제로 그는 미사 성체 조배 성무일과 성로신공, 삼종, 묵주신공 또는 복음서의 장면을 나타내는 여러가지 성성을 그리거나 성서 금구(金口) 성 요왕 그리고 동생에게 보내오는 신학과 영성의 여러 저작을 묵상하고 잠심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에게는 이제는 연구할 의무는 없지만 자신이 스스로 그곳에 돌아갔던 것이다. 나자렡에 있을 때 그리스도는 목수의 아들이었으나 역시 그는 천주의 말씀(로고스)이었다.
예배와 빈곤으로 엮어진 전생애를 통하여 천주의 말씀은 <샤르르> 수사를 완전히 포촉하고 있다. 고독과 무명에 대한 그의 취미가 아무리 극단인 것이라 할지라도 또하나의 부르심을 느끼는 것을 방해하지 않았다. 즉 그는 나자렡에 사는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위하여 독일어의 역서를 두권 사왔다. 하나는 성서였으며 또하나는 교리사였다. 그는 신약성서의 아라비아어 번역에까지 착수했다. 몸을 감추고 싶다는 그의 소원이 아무리 열렬할지라도 천주의 말씀이 빛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일년 이상이나 <샤르르> 수사는 이렇게 수도원 가까이서 생활하고 있었다. 넘어갈 수 없는 울타리가 수녀들과 은수자 사이를 격리시키고 있었다. 가장 작은 세계 두개가 나란히 서로 문을 잠그고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세속에서 떨어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바로 가까운 곳에서 신의를 지키고 무한에 대하여 천주의 심원에 향하는 같은 길의 괴도를 걷고 있었다. <쌩 미세르> 원장도 이 두개의 세계를 이편과 저편을 다름질쳐 다니는 수녀들이 그에게 고백한 것을 자기 혼자만 알고 있으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원장수녀는 이 일을 <빠레 르 모니얄>과 나자렡 시대의 원장이며 예루살렘의 크라라회수도원의 원장이 되어있는 <엘리자벹> 원장에게 보낸 편지 속에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엘리사벹> 원장 편에서도 나자렡의 은수자를 얼굴은 보지 않더라도 알고 깊다고 간절히 원했다. 어떠한 핑계로 예를 들면 특히 긴급한 편지를 보낼 일이 있다든가 나자렡에 가지 않으면 아니될 여자수도지원자를 같이 데리고 가야된다고 하는 핑계를 주어서 <쌩 미셰르> 원장은 <샤르르> 수사를 성도에 파견했다. 1898년 7월의 일이다.
백17키로미터나 되는 길이었다. 그리고 마침 혹서였다. <샤르르> 수사는 가는 도중에서 성체를 영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아침 일찌기 조반을 들지 않고 출발했다. 그러나 그는 오전 중에 성체를 영하려 생각하고있던 「제봐데」의 가톨릭신부를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단식을 한채로 길을 걷기 시작하여 저녁때 기진맥진하여 「나뿌우루즈」에 도착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그 지방의 주임신부였던 <라벡크> 주교에게 가서 영성체를 청했다. 시간도 늦었고 그 나그네의 이상한 몸차림과 피로하여 휘청거리는 걸음걸이 등이 <라베크> 주교에게 너무나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는 <샤르르> 수사를 정신병자로 생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수도지원자가 변명을 해서 겨우 이해되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샤르르> 수사는 그곳에 4일간 머물기 위하여 그는 수도원 지도신부댁에 준비한 숙소를 거절하고 크라라회수도원의 토지를 경비하는 토인 토막의 옆에 있는 오두막집에 은신했다. 엘리자벹 원장은 그에게 몇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방랑한 얘기를 간단히 하고는 또다시 침묵하고 말았다.
그는 성도의 전경을 전망할 수 있는 이 수도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종자매 <마리>에게 이렇게 써보냈다.
『수도원은 「베타니아」의 도중 예루살렘에서 약 2킬로메타나 되는 경치 좋은 위치에 있읍니다. 그것도 「세트론」의 함지 옆이며 ㄱㅁ람산의 바로 맞은 편에 서있읍니다. 이 수도원의 창에서는 예루살렘의 전경 겟세마니 감람산의 전체 베타니아 등이 보이며 또 멀리에는 모아브와 에덴의 산들이 쥴탄의 저편에 캄캄한 벽과 같이 높이 솟아 있읍니다. 최후의 만찬 후에 아고니의 동산으로 가기 위하여 예수께서 종도들과 같이 걸어가시던 길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