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사)순절 전례 解說(해설) 聖週間
새 戒命(계명)·새 聖事(성사)의 成立(성립)
聖油(성유), 洗足(세족), 聖禮(성례), 十字架(십자가) 조배
주교좌성당 禮節(예절)에 나가기를
발행일1962-04-01 [제321호, 4면]
聖木曜日
성목요일 저녁 각 본당에 예수께서 성체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미사를 올린다. 그러나 각 교구에는 이날 아침 성유(聖油)축성미사 한대가 있다. 이 한대 미사는 교구를 위한 미사이다. 그러나 이 미사는 교구의 모든 본당과 관련이 있다. 모든 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기원을 가진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많은 성사에 쓰이는 성유를 오늘 축성하는 것이다.
『이 미사는 나와 관계없다. 나는 주교좌성당 신자가 아니다. 나는 이토록 긴 예절에 참가할 시간이 없다.』하지말자. 성유는 모든 본당에 운반될 것이다.
그것은 일년을 통하여 많은 성사를 -성세 견진 종부- 집행할 때 쓰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성체 안에 한가지 역할을 담당한다. 그것은 성작성반 제대교회사제 주교축성에 쓰인다. 그러면 예수님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신자들의 모든 성화의 근원이신 선체를 세우신 날 성유를 축성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교만이 성유를 축성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교구성당의 유일한 머리 되신다. 「그리스도」란 기름으로 축성된 임군이란 뜻이다. 사제와 임군을 축성하는 것이 기름이다. 예수는 사제시오 임군이시다. 그 인성은 신비로운 기름처럼 깊이 투철하는 천주성으로 축성되셨다. 성유는 보통사람인 우리를 신자 즉 천주성에 참여하는 다른 그리스도 되게 한다. 성유는 우리 영혼 뿐만 아니라 성세와 견진을 받는 날 우리 육신까지도 성화시킨다. 그것은 부활을 준비하는 죽는 시간에 다시한번 우리에게 힘을 줄 것이다. 이 미사에 주교만이 영성체 하신다. 많은 신자가 이 위대한 예절에 초대되어있다. 미사후에 각 본당 대표가 새로 축성한 성유를 본당으로 가져단다. 성유를 가져가는 것은 다만 물질적인 봉사만이 아니오 이것은 생명의 근원을 본당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이 성유를 본당으로 가져가는 것이 참으로 종교적인 예절이 되어 주었으면 싶다.
『너희들은 나를 기억하기로 이예를 행하라』 성목요일의 미사 아니 모든 미사는 최후 만찬때 그리스도께서 하는 「재스추어」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모든 미사는 주님의 식탁에서 먹는 음식이오 감사의 행동이다. 모든 미사는 천국을 여는 참 제사를 거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천주의 식탁에서 열린 위대한 잔치 감사의 노래를 영원히 읊는 천상잔치와 같다. (루가 22-29)
성목요일 예수께서 취하신 「제수추어」 중 하나 가장 놀랠만한 것은 그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다. 우리는 <베드루>가 「프로테스탄트」(배반)한 것을 안다. 예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는가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신 새 계명을 주시고자 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는 그리스도의 이 「제스추어」는 우리의 사랑이 어디까지 가야하는가를 보이고자 하신 데 있다. 우리는 우리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서로가 봉사하는 자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새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새 성사에 가까이 갈 수 없다. 교회는 이것을 잘 알기 때문에 성목요일의 복으에 성체성사 세우신 이야기를 읽지 않고 세족(洗足)의 이야기를 읽는다.
교회는 미사때 복음 끝에 주례자로 하여금 공적으로 주예수의 이 「제수추어」가 거행되기를 희망한다.
聖金曜日
성금요일은 슬픈 날이다. 예절은 슬프고 통회하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성금요일 날 예수께서 죽음과 죄에서 개선하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지 아니하는 자들처럼 울지않는다. 부활은 확실하고 십자가를 빛으로 꾸미려 곧 올 것이다. 성금요일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날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성금요일은 희망과 영광의 날이다. <요왕> 종도 수난복음에서 우리는 이날 예수께서 당신이 왕이라고 긍정하신 것을 읽는다. 십자가는 교수형구(絞首刑具)가 아니다. 이날의 가장 감격적인 예쩔인 십자가 조배가 그것을 증명한다.
보름전부터 십자가는 가리워져 있다. 사제는 그것을 벗기고 신자들에게 성대히 보이면서 노래부른다. 그 노래는 애가(哀歌)가 아니오 희망의 노래이다. 『보라 십자가 나무를 그 위에 세상의 구원자가 매달렸도다』 그리고 신부와 신자들이 십자가를 향하여 친구하러 나간다. 신자들이 십자가를 친구하는 동안 사제는 IMPROPERIUM이라 부르는 그리스도의 책망을 노래한다. 이것은 분노의 말씀이 아니고 도리어 천주께로 돌아오도록 초대하는 말씀이다. 『나의 백성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는가 네게 근심을 준 것이 무엇인가 대답하라 나는 너를 에집트에서 해방시켰다. 그때문에 너는 너의 구세주를 위하여 십자가를 준비하였던가?』 이 책망에 우리는 『내 탓이오』로 대답하지 아니하고 개선의 노래로 대답한다. 『오 거룩하시고 강하시고 불멸의 천주여 우리를 긍련히 여기소서』 이 노래가 끝나면 또 개선의 노래를 읊는다. 『주여 우리는 당신 십자가를 공경합니다. 우리는 당신의 거룩한 부활을 찬미하고 현양합니다. 십자가의 나무로 온 세상에 기쁨을 가져왔도다.』
다음에 불란서 여왕 성 <라드곤드>께서 창설하신 「빠띠에」의 성십자가수도원에 참십자가 한 쪼각을 성대히 모실 때 <버낭스 폴뚜나>가 6세기에 지은 PANCE LINGUE를 노래한다.
이 찬미가를 만든 시인은 그리스도의 참 왕위가 어디있는지를 알았다.
즉 사랑과 고난 예수께서 지금 왕하시는 천국에 고난이 없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수난의 흔적을 지니신다. 전에 종도들에게 하신 것처럼 간선자들에게 그를 드러내신다. 고난의 원인이었던 것이 영광의 근원이 되었다. 성금요일은 그리스도의 개선이 시작하는 날이다. 왜 우리늰 성금요일에 영성체하는가 전에는 하지 아니하였는데 어떤 시대에도 성금요일에 미사가 없엇다. 처음엔 신부도 신자도 이날 영성체 하지 아니했다. 8세기부터 로마예절에 신자들의 영성체가 나타났고 빨리 보편화되었고 수세기동안 계속되었다. 신자들의 영성체가 사라진 것은 13세기 영성체를 드물게 한 사실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모든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번 영성체 하도록 한 1215년의 「라떼란」공의회의 유명한 규정을 낳게까지 하였다. 한편 성금요일에 영성체 하는 습관이 17세기까지 되살아났다.
성주간 새 규정위원회가 모든 필요한 요소를 검토한 후 성금요일에 영성체할 가능성을 신자들에게 주고 추기경들이 먼저, 다음에 성하께서 이 제출안을 허가하였다. 우리가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성십자가를 조배한 후 이때 특히 열심하고 얻을 바가 많지 않을 수 없는 영성체로 주의 희생과 일치하면서 구원의 결실의 한 부분을 각자가 가지는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