外信(외신)이 傳(전)하는 大主敎(대주교) 任命(임명) 消息(소식)
信仰(신앙)·知性(지성)을 基盤(기반)삼아
마땅한 資格(자격)을 具備(구비)
昇格(승격)된 韓國(한국) 가톨릭 機構(기구)에 論評(논평)
대주교 3위 임명과 한국자치교구 실현에 있어 한국가톨릭은 그같은 대우와 평가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요지의 외신은 다음같은 소개기사를 실리고 있다. 한국교회사의 자랑할 만한 보람과 교세의 발전을 숫자로 열거하고 성청은 한국신자에 선진국과 동등한 교회 조직상의 자격을 부여한 것이라고 하였다.
【바티깐=NC】 한국대주교와 주교들의 본방인(本邦人) 성직계통(聖職階統)을 창설한 성청은 한국교회의 성공적인 성작을 평가하고 한국가톨릭에 완전한 교회기구(機構)를 부여한 것이다.
동 기구(機構)는 번영의 일로를 달리고 있는 남한과 공산치하에 박해받는 북한교회를 통합한 것이다. 북한 침묵의 교회는 적어도 5만7천명의 신자들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북한인구는 약2천3백만이다.
한국에 가톨릭 신앙이 전래(傳來)된 것은 어느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된 일이다. 그당시 한국은 외세(外勢)의 영향을 엄금하고 있었다. 소위 쇄국(鎖國)정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성인층은 과학 및 다른 학문의 서적을 탐독하고 있었다. 이같은 서적은 북경(北京)으로 파견되는 연례(年例) 사절단(使節團)을 통해서 입수할 수 있었다. 동 서적 가운데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우연한 기회에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약간의 학자들에 의하여 진리를 추궁하기에 충분했다.
첫 한국인 신자는 1784년 북경을 여행한 이승훈(李承薰)이었으며 그는 그곳서 <베드루>란 본명으로 영세 입교했었다. 그가 귀국하자 학자들과 고관대작들을 영세시켰다.
1791년 2명의 신자가 외교인 제례(祭禮)를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순교한 것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첫 신부는 중국인 周<야고보> 신부이다. 그는 1794년 입국이래 4천명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 그후 파리외방전교회원 주교 1명과 뒤이어 동 회원인 2명의 선교사가 들어왔다.
1837년 전후해서였다. 동 <임벨> 주교와 선교사 및 76명의 한국인 순교자들은 1925년 복자(福者)에 올림을 받고 신앙을 위해 순교한 자로 선언되었다. 그들은 1839년 전후에 순교했으며 그당시에 9천명이 넘는 신자들은 혹독한 박해를 받았던 것이다.
첫 한국인 신부는 복자 김 <안드레아> 신부이다. 그는 1846년 참수(斬首)의 처형을 받았다.
오늘 한국인 신부는 282명이다. 5년에는 210명이었다. 동기간에 한국 수녀는 819명에서 1,170명으로 증가했으며 대인영세는 31,613명에서 66,980명의 높은 증가를 보여주고 있다. 북한 공산치하에서와 한국전쟁중에는 많은 선교사를 처형 또는 추방했다. 동산당에 희생된 자 중에는 「워싱톤」 출신 메리놀회원 <파트릭 J. 번> 주교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