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저를 알고 그 말씀을 준행하노라』(요안 8,55)
자고로 어머니의 피나는 공(功)이 훌륭한 아들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도 범상(凡常)하고 타당한 결실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반항의식과 격정에 휘몰려 걸핏하면 기성세대를 반발(反撥) 멸시 내지 묵살하려고 드는 젊은 기질이고 보면 그들보다 못배웠고 구세대의 사람인 한 어머니로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보겠다는 욕심은 한숨으로 사라지기가 일수다. 『말을 들어줘야 하죠. 감히 엄두도 못냅니다.』 이런 귀결이다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남들과는 차별난 가난이 부모 탓으로 불평하기 시작하고 똑똑한 놈에겔수록 그런 생활일망정 지속하겠다는 부모의 허기진 노력이 비약도 진전도 없는 따분한 것으로만 보인다.
『좀 시원히 탁 트이는 구찌(방법 · 길)는 없을까?』 답답해지는 젊은 마음엔 밤낮없이 공부하라는 둥 성당 가라는 둥의 권유는 도모지 캐캐묵은 간섭이요 노파심으로만 귀찮아 진다.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이 이만하면 알아서 하도록 둘 일이지 복종? 그따윈 어린애나 하는 일이고 다 큰놈이 꼬박꼬박 낡은 윤리관에(倫理觀) 올가매여 꼼짝을 못한다?』 이런 곤두선 반발이 죽자 살자 아들자식에게 희망을 거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아 줄 리가 없다.
『경험! 물론 중요한 거지만 그것이 새 세계를 창조하는데 얼마나 힘드느냐 말이다. 원자세계는 답습과 경험이 아니고 발견이며 발명이다.』 이렇게 제법 의젓한 논지를 세우고 버티어본다.
그러나 지난 3월말의 신문지상에서 이런 쭈볏한 논지와는 달리 마음에 드는 참한 태도를 보았을 때 갈피를 못잡는 어수선한 젊음에게 감히 큰소리를 해졸 기운을 얻었다. 『20세의 약관으로 고시에 합격, 그의 노력과 재주도 있겠지만 시험장에서 시간이 끝날때마다 미음을 병에 넣어 가슴에 품었다가 먹이기까지 한 가난하나 교육열에 철저했던 어머니의 피자는 공의 결심』이란 대서(大書) 기사를 읽었다. 재주와 노력과 어머니의 공 이렇게 드러난 요인(要因) 외에 또 한가지 필수의 요건은 강하게 매어주고 세운 착실한 학생의 복종의 미덕(美德)이란 말이다.
고시공부로 수척한 아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공부가 부족하다고 책보따리를 싸들려 시골로 내려보내는 어머니의 책망을 감수할 줄 알았던 그 의미있는 온순이 합격의 영예를 뒷받침한 얼마나 큰 힘이었던가를 헤아려 볼 일이다.
『진실로 복종하는 사람만이 승리를 예산할 수 있다.』 『나는 내 성부를 알고 그 말씀을 준행하노라』 오늘 성자 예수의 성부에 대한 복종이 완전한 승리와 정복의 연유가 된다.
법은 생활을 다스린다. 또 법은 인신(人身)과 사업과 교통 등의 사회질서를 단속 조절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하여 천주의 법은 전지하신 천주께 대한 우리의 연관을 통제한다.
넷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할 것을 명하셨다. 여기서 부모란 단순히 생친(生親)과 양친(養親)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선 친부모에게 복종해야 함은 물론이다. 먼저 우리에게 천주를 대신하시는 그분들은 인생에 대해 우리보다 더 체험하신 분들이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신발명도 결국 이런 오랜 선대(先代)에서 쌓아온 경험의 결실이지 결코 비약이 아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세상의 무엇보다 우리를 더 사랑한다. 그들이 권유하는 바는 비단 자식에게서 덕을 보겠다는 얇은 심산(心算)이 아니라 되도록이면 행복을 누리도록 하자는 헌신적인 사랑의 고무(鼓舞)다. 아무리 나이들어 성장했을 때라도 현자(賢者)는 우선 부모와 상의하고 그래도 해결을 얻지 못할 때는 영신의 지도자인 신부께 상의해 온다. 부모가 육신을 준 어버이라면 신부는 영신의 어버이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가지도 희생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또 천주의 법을 해명하고 지도하도록 힘입은 사람들이다. 힘에 겨운 일 같더라도 그의 말을 따라간다면 손해보다는 축복의 확률이 크다. 사회에서 우리가 대통령으로부터 임무를 쥔 모든 말단 공무원에게까지 복종하고 고용인이 고용주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처럼 무식하고 수양이 없어 보이더라도 부모와 신부에게 복종해야 한다.
요즘 항간에는 남발된 독립정신이 『이유없는 반항』의 형식으로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성부에게 보인 태도나 정신과는 상반의 것이며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즉 우리의 영신적 지도자, 사회적 지도자, 그리고 기관장과 갖앗ㅇ에게 우리가 취(取)하기를 원하시는 태도와는 정반(正反)의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든지 이의(異議)가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구속이란 큼지막한 사업을 위해 하자 없으신 생명을 바치기까지 오직 성부의 뜻을 따른 갸륵한 복종을 회상할 때 적어도 우리를 위하여 우리쪽으로 서 있는 사람이고 기관이라면 협력하고 복종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면 분산과 특단적인 항거보다는 엄청난 이득을 얻을 것이 확연하다.
외람된 묵살이, 그것도 남 아닌 부모의 가슴에 못박는 상흔(傷痕)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철부지한 이탈에 합세할 수는 없다.
원칙적으로 협력과 복종관계로 얽혀매인 사회적 동물인 인간사회에서 어느것 하나 복종의 미덕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없다.
미미한 클럽 활동에서 축구·야구 등의 팀워커(Team Work) 군개국가의 조직에까지 모든 것은 종으로 복종관계다.
어느층에서든 이 복종의 선이 터지면 그 조직은 파괴되기 시작하고 본래의 목적한 대로의 성과는 생각할 수도 없다. 법을 준수하고 장상의 지시를 따르고 타의 계획에 보조협력한다는 것이 결코 자존(自尊)을 상하거나 권리를 포기하거나 비겁하게 굽실거리거나 오녜화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전지 전능하신 그를 따르는 우리의 회의와 그가 주시는 시련에 대한 불만과 불평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를 반성해야겠다.
李鍾淳 神父(서울 明洞대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