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84) 仁川(인천)교구
새 意慾 실은 仁川
『산 교회』 보람 다 하길
발행일1961-10-22 [제300호, 3면]
교구(敎區)로 승격되어 새로 주교님을 뫼시게 되는 벅찬 기쁨에 쌓인 인천(仁川)!
주교님 환영과 교구로서의 첫 출발을 하는 주교 착좌식(着座式) 및 장엄할 교구 이양식(移讓式) 준비에 바쁜 답동(畓洞)의 감목대리관(監牧代理館)은 오늘도 시내 각 본당 신자대표들이 성대할 그날의 절차를 의론하기 위해 회합을 갖고난 다음이었다.
『주교님께서는 언제 오신답니까?』
『아직 주교님으로부터 확실한 날자를 알려주신 편지를 받지 못했지만 아마 10월20일경에 이곳으로 오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목대리로서 『들너리는 두 번이나 섰지만 신부(新婦)는 한 번도 못 뵈어본』 교구 창설의 공로자 <요셉.기본스>(盧) 신부님은 「메리놀회」에 소속된 12명 주교님들 중 가장 젊은 주교인 훌륭한 새 주교님의 칭송이야기를 잠시 늘어놓았다.
서울의 관문(觀門)으로서 옛날에는 『제물포』로 알려졌고 간조(干潮)와 만조(滿朝)의 조수 차이가 격심한 항구로서 또 수도(首都)의 관문이 되는 항도(港都)이기 때문에 나라에 큰 외침(外侵)이 있을 때마다 전화(戰火)를 잘 입게 되는 인천은 1950년 9월 남침(南侵)한 공산괴뢰군을 무찌르기 위한 UN군의 상륙(上陸) 작전으로서도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우리나라 최근세사(最近世史)와 교히ㅗ사에 그 이름들이 자주 등장하는 강화(江華) 백령(白翎) 연평(延平)도 등 여러 섬이 다 이 교구의 관할지역이며 북경(北京)에 가서 성세를 받고 복음의 씨를 이땅에 갖고 돌아온 <베드루> 이(李承薰)의 무덤이 만수동(萬壽洞)에 있다. 그러 저러한 관계로 이 지방에 비교적 복음의 씨가 일찍 뿌려져 1889년에 이미 본당이 설립되었다.
2년 전인 1959년 가을 서울교구 감목대리구로 독립교구 설정을 준비하기 시작한 이 지구에는 답동(畓洞) 송림동(松林洞) 부평(富平) 강화(江華) 연평도(延坪島) 백령도(白翎島) 김포(金浦) 도화동(道禾洞) 선인동 등 9개처에 본당이 있으며 신자수는 약 2만2천명인데 한국교회 전체적 평균 비율보다 훨씬 높은 「퍼센테지」를 나타낼 뿐 아니라 영세자 많기로 이름이 높아 외방전교신부님들 사이에서는 『선교사의 낙원』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한다. 교회가 경영하는 사업체로는 아직 신설한 것은 없고 서울교구로부터 물려받은 것들인데 교육기관으로는 「박문유치원」 「박문국민학교」와 그리고 「박문여자중·고등학교」가 있으며 사회사업으로는 성 바오로회 수녀들이 경영하는 「해성(海星)보육원」이 있다.
평신자 사도직(平信者使徒職) 조직은 「레지오·마리에」 운동이 활발하여 「바다의 별 꾸리아」 산하에 성인(成人) 「쁘레시디움」 18개가 있고 또 소년 「꾸리아」 산하에 미성년 6개 「쁘레시디움」이 있어 도합 24개 「쁘레시디움」에 행동단원 265명, 협조단원 749명을 거느리고 있다.
그러나 65만 인구에 신자수는 불과 2만 2천명이니 아직 전교할 대상자가 63만명이 남아있는 포교의 개척지(開拓地)라 할 일은 태산같이 쌓여있다.
『만일 교회의 임무가 전교가 아니라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다』고 <맥나흐튼> (羅) 주교님의 성성식 때에 <쿠싱> 추기경이 하신 말씀을 빌리지 않더라도 수많은 순교자의 선혈(鮮血)과 수많은 정의와 자유의 병사들의 피로써 물들여진 이땅, 불과 수백 「메타」 밖에 붉은 오랑캐가 노려보고 있는 이 전선에서 새 주교님의 임무는 영광과 함께 각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