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寶鑑(시사보감)] (21) 20世紀間敎會史摘記 (4)
발행일1962-04-08 [제322호, 3면]
10世紀
▲910년=「아귀타닌」의 백작 <윌리암>이 분도원을 건설했다. 이곳 이 수도원 및 교회 개신(改新)의 중심이 된다. ▲911년=「노르만디」에 가톨릭이 전파되다. ▲915년 요한 10세가 북부지역 이태리 영토에서 「모스렘」 교도를 축출 ▲962년=<옷또> 1세 대왕이 요안 12세에 의해 대관식을 올렸다. 「샬마뉴」의 왕국을 회복하고 신성로마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리하여 독일과 이태리는 독일왕후가 통치한다. ▲966년=폴란드의 첫 왕족 「미에섹고」가 영세함으로 라띤 그리스도교를 「폴란드」에 도입했다. ▲993년=요안 15세가 성인 위해 올리는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앞서 성인 공경을 공식으로 실행했으나 주교의 승인으로 실행되었었다.) ▲997년=<성 스테파노> 항가리를 통치하다. 그는 성직조직 및 라띤 그리스도교 건설에 공헌했다. ▲999-1003년=분도회원으로 최초로 불란서인 교황 <실베스터> 2세
11世紀
▲1012년=성 <로마알드> 은수(隱修)처를 건설. ▲1027년=「엘렌」회의에서 동족상잔(同族相殘)을 막는 수단으로 신(神)을 정전(停戰)을 선포했다. 동 정전의 효력은 휴전중에 한했으나 후에 더 연장했다. ▲1047년=교황 <크레멘트> 2세 서거. 독일영토에 장사된 유일한 교황. ▲1049-54년=성 <레오> 9세 광범위하고 결정적 영향을 주는 교회개혁을 단행. 교황선거 성직자의 독신생활 교회제반 성무를 제도화(制度化). ▲1054년=「콘스탄타노플」 총주교 <세루라리우스>가 교황에 반기(反旗) 동방교회 즉 올토독스를 영도하고 이단(異端)에 함입했다. ▲1059년=라떼란 공의회에서 교황선거를 새로 제정하고 투표권행사를 추기경에 국한시켰다. ▲1066년=성 <에드워드> 정거자 사망. 「웨스터 민스터」대성당 건설. ▲1073-1085년=성 <그레고리오> 7세. 그는 계속 개혁을 단행하고 군주들에 의한 성직수여 등을 철폐했다. 영국의 <헨리> 8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절충에도 응하지 않았다. 교황이 황제를 제재한 첫 케이스였다. ▲1077년=이때 황제-교황 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는데 그 중요 원인은 <헨리> 6세가 주장하는 성직수여에 있었다. <헨리>는 후에 교황에 항거하다가 결국 폐위당했다. ▲1095-1099년=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십자군은 1099년 성지 예루사렘을 탈환했다.
12世紀
▲1108년=수도원과 수도원 경영 학교가 큰 영향을 준다. ▲1111년=고위성직 수여문제의 해결책으로 교황 <파스칼> 2세는 다음같이 제안한다. 모든 고위성직자는 복종하고 그 댓가로 황제는 성직수여의 권리를 포기하라고 하였다. ▲1115년=성 <안셀무스> 서거. 스콜라철학과 신학이 발전했다. ▲1122년=고위성직 수여에 관한 것을 포함하는 정교조약(正敎條約)-그 내용은 황제는 세속권리의 상징으로 성직을 수여하되 영성적인 표지는 수여 할 수 없다. 교회적 직권은 교회만이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제는 교황선거에 간섭할 수 없다.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콘콜다트」 즉 정교조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