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서 있으려나 「새남터」 木造(목조) 순교탑
발행일1961-10-22 [제300호, 4면]
이 글은 지난 10월1일 서울 「한강」의 「새남터」 순교지서 거행된 복자첨례기념미사에서 <마두> 윤(尹亨重) 신부님이 한 강론의 전문이다.
윤 신부는 이 강론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를 이룩하는 기틀을 마련하려 생명을 바친 순교선열에게 대한 우리의 효성(孝誠)이 너무나 미약함을 경각하고 이 숭고한 어버이에게의 효성을 발휘하길 「유언」(遺言)이라고까지 표현하며 호소했읍니다.
-編輯者註
오늘 공경하올 노주교님과 제위신부님들 앞에서 교형자매 여러분께 강론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기는 주교 신부들이 치명하신 「새남터」입니다.
나는 소신학생 시대부터 이 자리를 지켜왔읍니다. 저 건너 「구용산」 성심여중고교사가 그전 우리 신학교이었읍니다. 그 때 매주 목요일이면 전교생이 지금 국군묘지 바로 그 자리인 동작리에 있던 신학교 별장에로 산보를 갔다가 돌아오고 하였는데 대개는 「구용산」 다리를 건너 이 길로 지났고 돌아올 때도 이 길로 지났읍니다. 그때 우리를 인도하시던 부제님들로부터 이 자리가 치명처라고 들었읍니다. 그때부터 이 주위가 ㅂ변형될 때마다 이 자리가 어떻게 되나하고 지켜왔읍니다. 「서빙고」에서 시작하여 「신용산」을 에워싼 저 제방은 을축년 흥수 이후 그것을 표준하여 싸올린 것이었읍니다. 우리 소년시절엔 이 자리가 잡초 욱어진 모래밭이었읍니다. 그다음 뽕나무밭이 되었읍니다. 경부선 철_ 북선공사가 진행될 때 이 터의 흙을 파서 저 철둑을 쌓아올렸읍니다. 그때 이 지반은 저 아래 강변과 거의 같았읍니다. 그 후에는 시내에서 나온 쓰레기가 이곳을 메워 지금까지 내려왔읍니다.
흙은 다른 흙일지라도 자리는 같은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복자 범주교, 나신부, 정신부, <안드레아> 김신부, <갸오로> 현회장, 중국인 주문모 신부님이 형역들이 에워싼 가운데 무릎을 꿇고 칼을 받아 순교하였읍니다. 여기를 나오면 이들뿐 아니라 저 서소문 사거리에서 참수를 당한 다른 복자들도 생각하게 되고, 이렇게 우리 79위 복자들을 생각하면 유명무명 약 1만명의 모든 순교자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죽엄이오, 죽엄 중에도 제 명이 죽지 못하고 남의 손에 당하는 죽엄이 더욱 참혹하고, 남의 손에 당하는 죽엄 중에도 말 한 마디면 무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잔인무쌍한 악형 중에 그만 한 마디를 아니하고 죽엄을 감수한다는 것은 인력을 초월한 영웅적 행위입니다. 1만명의 우리 순교자들이 모두 이런 분들입니다. 이 순교자들의 덕택으로 가톨릭이 지난 세기 우리나라에서 근절되지 아니했고 그 덕택으로 우리 자신들이 지금 천주의 자녀가 되어있읍니다.
배교하는 말 한 마디면 살아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아니하고서 감심으로 순교한 것은 아마 우리나라 치명자들이 마지막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독일의 「나치스」나 쏘련의 공산당은 가톨릭 신자를 많이 죽였지만 「스파이」니 「반역자」니 하는 오명을 씨워죽였고 배교하면 살린다는 조건은 애당초 붙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순교의 영웅적 가치를 보든지, 순교자들로부터 은공을 생각하든지 우리 순교자들을 극력 현양하여야 합니다. 우리 가톨릭만이 이러한 의미의 순교자,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을 가졌읍니다. 이들을 어찌 모말밑에 묻어두고 지낼 수 있읍니까.
8천명 교우들의 피를 흘린 1866년 병인년 대박해의 백주년인 1966년도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읍니다. 이 초라한 임시 순교 기념탑이 언제까지나 여기 서 있어야 되겠읍니까? 여기는 무수한 기차승객들을 상대로 하는 선전효과 백「퍼센트」인 장소입니다.
순교의 영웅성을 표현하는 웅장한 본격적 순교기념탑이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서울 명승지 중 하나가 되어야 하고, 외국 관람객도 끌도록 되어야 합니다.
「서소문」 사거리에 순교기념관도 세워져야 합니다. 이 기념관은 박물관급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그 규모가 커야 합니다. 이제 순교기념관이 완성되었다고 하고 그 내부 시설에 대한 상상을 되는대로 하여봅시다.
1호실에는 이조시대 왕궁의 각 제복이며 고급관리들의 제복과 문화적 기명들을 진열하여 놓고 만조백관이 국왕에게 조회하는 벽화를 크게 그리고 2호실에는 민간 풍속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모형을 만들어 두고, 조상제사 지내는 벽화를 크게 그려두고, 3호실에는 신부 한 번 본 일도 없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씩씩한 모습으로 순교하는 「등신대」의 모형을 진열하고 4호실에는 여러번 내린 「척사윤음」이며 유생들이 올린 서학 탄압의 상소문을 진열하고 5호실에는 「곤장」 「태장」 「치도곤」 「칼」 「줄톱」 「주리」 등의 형구의 모형을 진열하고 6호실로부터 10호실까지는 그런 형구로 순교자들이 형벌을 당하는 등신대(等身大)의 모형을 진열하고, 10호실부터 15호실까지는 참수치명, 교수치명, 장하치명, 백지치명, 구덩이치명 등을 순교자들이 당하는 「등신대」의 모형을 진열하고, 16호실과 17호실에는 순교자들의 통계표며 박해시대의 유물인 땅속에서 발굴된 고상성패 등을 진열하고, 20호실에는 박해시대의 손으로 쓴 교회서적을 진열하고, 21호실에는 종교평활르 얻은 다음 한국 가톨릭의 발전상의 도표를 진열하고 22호실에는 「로오마」 가톨릭 자체의 위대성을 한 눈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도표나 모형을 진열하고, 출구에는 무료로 집어가라는, 가톨릭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소책자들을 쌓아두고……
여러분! 4·19혁명을 여러분은 친히 목도하셨읍니다. 학생들이 경관의 총탄에 쓸어진 시체를 메고서 행열할 때, 또는 피묻은 뻘건 옷을 기폭인양 높이 들고 행열할 때 그것을 바라보던 시민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감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죽은 이의 시체나 흘린 피는 언제든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찌릅니다.
우리 순교기념관은 이런 효과를 확실히 낼 것입니다. 모든 실을 관람하고 나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감격을 받고 나가면서 다른 종교나 교파는 모두 분열되고 속화되고 있는데 유독 천주교만 저렇게나 많은 순교자를 내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두고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순교기념관을 관람할 사람들이 있겠읍니까? 의심 없읍니다. 시내 지식인들은 다 한 번 참관할 것이오 시내 모든 대학이 매년 한 번씩 참관할 것이오 지방에서 견학오는 단체들이 다 참관할 것이오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다 한 번씩은 참관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해 두 해가 아니라 이 서울시가 존속하는 날까지 영구히 계속할 것입니다. 지금 서울시의 인구는 2백50만명입니다. 20년 후에는 5백만명이 되고 50년 후에는 8백만명이 되고, 이렇게 세계적 도시가 되어감에 따라 우리 순교기념관이 내는 효과는 더욱더욱 넓어질 것은 확실합니다. 전교상이 순교기념관보다 더 큰 효력을 낼만한 교회기관이나 단체는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거창한 사업들을 목표로 하고서 유지들이 모여 한국천주교순교자현양회를 결성하고 일제 때에는 원주교님의(1939년) 해방 후에는 노주교님의(1946년) 인준까지 받았읍니다.
이 회의 취지에 찬성하시는 신부님들은 교구별이 없이 자동적으로 본회의 「위원」이 되시고 이 취지에 협찬하시는 주교님들은 현양회의 「고문」이십니다. 더구나 우리 노주교님은 「고문」뿐 아니라 저 건너 「절두산」을 사들일 때 「유공회원」이 되어주셨읍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현양회에 기대를 둘 수는 없게 되었읍니다. 이 순교자현양회는 동맥이 끊어졌고, 따라서 동회가 추진시키던 순교기념관 건설운동은 허리가 잘리워졌읍니다. 이 운동이 대중을 향하여 다시 머리를 들기는 극난하게 되었으니 「신용」을 잃은 까닭입니다. 신용은 이런 운동의 「생명」입니다.
이런 일이 성취되자면 두 가지가 있어야 됩니다. 정신과 사상이 있어야 하고 또 능력과 재력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과 사상이 있는 이는 능력과 재력이 없고, 능력과 재력이 있는 이는 그런 정신과 사상이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를 여러분께 소개하겠읍니다.
1954년 성모성년대회를 앞두고 복자회 수녀들이 내게 와서 전시회를 하겠으니 순교자현양회에서 수집한 기념물품을 빌려달라고 청하였읍니다. 나는 순교자현양회 중앙위원장으로서 1·4 후퇴 때 현양회물품을 견고한 궤짝 속에 넣고서 부산 메리놀수녀원에로 소개시켰고 그때까지 서울로 운반하지 않고 있었읍니다. 나는 수녀들의 청을 단번에 거절하였읍니다. 속 정신은 없이 이런 기회에 그저 『북치고 나발불고』 하자는 것밖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읍니다.
얼마 후 나는 복자수녀원에로 사제성사를 주러 갔읍니다. 그런데 수녀원측에서도 벌써 처음부터 그런 기념 물품을 수집하여 보관하여 오는데 그 분량도 상당하였읍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런 「정신과 사상」이 수녀들의 골수에 깊이 박혀있음을 발견하였읍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