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評論(평론)] G.그린은 가톨릭 作家(작가)?
발행일1961-11-04 [제301호, 4면]
소설가 <그람.그린>을 가톨릭 작가라고 한다. 가톨릭작가란 어디 기준을 두고 한 말일까. 작가가 반드시 영세한 자이어야 하는가? 그의 작품이 그런 뜻으로 가령 교회서 설정한 상같은 것을 받아야 하는가? 그의 역량(文學的才能) 보다 「가톨리시즘」에의 신심에 기준을 두고 있어야 하는가? <그린>에 있어 그를 가톨릭작가라고 부르는 연유는 좀 다른 각도를 가졌음이 분명하다.
어떤 뜻으로서나 <그린>을 교회에 앞장선 선전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가톨리시즘」을 한껏 미화(美化)하지 않는다. (물론 수법에 있어 그러하다) 오히려 지옥의 계절(季節)이 한없이 길다. 작품 『사랑의 終末』(혹은 愛絡等으로 번역되었음)의 <사라>는 형편없는 죄녀(罪女)이고 육욕의 고뇌에만 시달린다. 그가 신(神)에 접근하자 세상과 인간에서 아무런 즐김을 얻지 못한다. 작품 『권세와 영광』에 나오는 신부(神父)는 그가 「가톨리시즘」__ 가졌기 때문에 그 선견(先見)으로 인해 번민한다. <빠스칼>은 「빵세」에 서신 없는 인간의 비참을 그렸다. <그린>은 신과 더불은 인간의 비참을 색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죄인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그가 그리는 굉장한 죄인들을 통해 오히려 가톨릭 성격을 여지 없이 묘사하고 있다. 비꾸러지게 들어맞는 말이라 할까. 무명(無名)의 신부 <핀키> 『부라이튼롴』에 나오는 소년깽. 『번타웉 케이스』에 나오는 거룩한 위선자 등은 어떤 편이냐면 그리스도교 윤리와는 거리감(距離感)을 주면서 공감을 준다. 가령 무명의 신부, 거룩한 위선자의 적수(敵手)의 사회정의, 인간애에의 회생을 찬양하고 있다. 죄의 묘사가 <그린>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라>와 고민하는 신부는 결국 성인으로 귀결된다. <그린>은 결국 <프랑쏘와 모리약>을 따른 것 같고 그의 작품세계를 죄인 가운데 제한해 두고 있는 모양이다. <모리약> 역시 그를 가톨릭 소설가라 할 수 있느냐는데 불을 뿜는 이론(異論)이 있다.
<그린>은 생각하기를 천당을 믿으면 지옥을 믿지 않을 수 있느냐는 같고 지옥을 믿을 때 천당을 믿기 시작한 거라고 하는 것 같다. 이게 그의 단견(短見)인 것이다. 그의 작품을 파고든 것을 보면 그러하다. 그 작품상 수육(受肉=인칼나시오)의 본뜻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이때 본뜻이란 언외(言外) 또 언어로 표시된 그 이상의 함축성(含蓄性)을 말한다. 육(肉)의 돌연이변(突然異變)이랄까 그런 것을 지나치게 치겨드는 나머지 그 본뜻을 망각하는 듯하다. <아이다>의 엷은 여름옷 앞가슴이 <핀키> 신부의 혐오를 자극했다 라던가 작품 『사건의 핵심』에 나오는 <루이스>는 모기장을 친 침대에 앉아서는 『육체를 뒤집어 쓴』 「스코비」를 생각한다. <그린>의 신부 묘사는 신부들의 세계를 파고들지 못했다. 작품 『번타울 케이스』에 나오는 신부들을 보면 나환자촌에서 그들은 영혼을 추구하는 자들이기 보다 오히려 전기(電氣), 벽돌만들기 같은 문제에 지나치게 억메어 두고 있음을 본다. 작품 『巨室』에서도 <부라운> 신부는 적당한 고난보다 부당한 고난에 허덕이게 해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린>은 피상적인 혹은 재래적(在來的) 의미의 가톨릭 소설가는 아닌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는바 그는 결코 좁은 윤리가는 아니다. 고도로 편파(偏波)적인 것을 막고 더욱 강력한 복음 및 의욕적인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그린>을 가톨릭 소설가로 형성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우리가 추구할 수많은 문제가 남아있다. 작품고증(作品考證)-以下 中略
<그린>작의 주류(主流)는 죄의 세계 및 그들이 호흡하는 세계인 것이다. 인간관계에 있어 완전한 한 죄녀인 <사라>가 십자가에 손발을 못박힌 그리스도상 앞에 『주여 당신이 십자가에서 나려와 나를 대신으로 못박아 주면』하면서 『그러러면 나도 당신같이 고난을 당하고 당신처럼 나을(治療) 수 있겠나이다』 이같은 훌륭한 묵상을 할 수 있게 된다.
가톨릭 작가들이 심각히 생각하는 것은 원죄의 교리이다. <그린>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원죄에 대해 자기대로의 성격을 묘파(描破)해가고 있는 것이다. 『선(善)은 인간 육체 안에 다만 한 번만 완전한 수육(인카르나시오)을 깃틀잡지만 악은 항상 그 집을 발견한다』 이렇게 육체 안에 깃드는 악을 원죄와 연결시키고 있다. 원죄와 인간 육체간에 깊이 파고들 의욕을 그는 버리지 않는다. 그의 최근 작 『권세와 영광』이나 『번타울 케이스』 바로 그것들이다.
결론적으로 <그린>은 가톨릭 작가이다. 최선의 의미에서 가톨릭 작가이다. 그 연고를 단적으로 표시하면 <그린>에 있어 인생의 의의는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이 그 중심인 것이다. 독자에 혼돈을 주면서 그러나 인간의 운명에 심오한 명상을 준다. 그는 가톨릭 작가의 직능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