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29) 42세 ①
발행일1962-04-15 [제323호, 4면]
1900년 8월 후꼬오는 말세이유 항구에 도착했다. 「쌩뽀오므」에로 바쁘게 순례를 하고 그곳에서 성녀 <마리아 막다레나>에게 기구를 올린다음 그는 빠리행 기차에 올랐다.
1900년 그것은 누구나 말하기를 프랑스의 「좋은시대」라고 하는 때였다. 거의 30년동안 국경에는 평화가 군림하였고 국가의 제정은 호조를 이루고 있었다. 물가는 비싸지 않고 그러나 임금은 더욱 쌌다. 표면이 영화에 빛나 있을 때 뒷골목에는 빈곤이 지배햇으며 노동 조합은 자본주의의 공세에 대하여 겨우 저항을 조직하였다.
당시 노동자와 식민지의 빈곤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동양에서 건너와서 수도(首都)에 올라가려고 하는 이 기묘한 방랑자 이외에는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을 것인가.
빠리에 도착하자 샤르르 수사는 즉시 「쌩오규스 땡」 보좌신부에게로 갔다. 보좌신부는 어이가 없어졌다. 수일전 『자사렡에 머물러 있거라』하고 전보를 치지 않았던가. 그러나 샤르르 수사는 벌써 출발한 뒤였다. 처음에는 불만하고 불안하였으나 즉시 <유브랑> 신부는 못마땅한 것을 참고 군소리를 하지 안키로 하였다.
그는 이것은 변덕이 아니라 깊은 저항하기 어려운 마음의 호소라는 것을 이해하였던 것이다. 지도신부의 찬동에 마음이 진정되어 샤르르 수사는 또다시 기차를 타고 눈의 성모수도원으로 향했다.
그는 세차례나 이 커다란 수도원 문의 종을 울렸던 것이다. 그는 피로하고 먼지 투성이였다. 수도자들에게 잠자리와 수프를 얻으러 온 여러 사람의 걸인들과 함께 그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부랑자들과 먹고 그들과 같이 광속에서 잤다.
다음날 아침 그는 미사참례를 하려고 최초의 기도시간에 일어나 10년전에 그를 이 수도원에 받아들여준 대수도원장 <동 마르땡>에게 면회를 청했다. <동 마르땡>은 샤르르 수사와 알베리크 수사와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높이 벌려 샤르르 수사를 맞아들여 옛날부터 잘 알고 있는 이 수련자의 서품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해주기를 승락했다.
우선 후꼬오는 로마에 바삐 여행을 했다. 필경 이것은 그레고리오 대학의 몇 사람의 신학자에게 작은 형제수도회의 회측 초안에 대한 의견을 듣고 또다시 미라노에 가서 성 <오규스땡>의 발자취에서 기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수일간 10년간이나 만나지 않았던 「브로고오뉴」의 「발빌레이」에 있는 여동생에게 잠간 들렀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돌아오자 그는 심령수업을 시작했다. <동 마르땡>은 그에게 지극히 기묘한 독방을 주었다.
그문은 인기만 하면 바로 그곳은 교회의 가대석이어서 제단의 바로 정면에서 기구를 할 수 있는 방이었다. 대수도원장은 이 손님에게 도취한 나머지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친애하는 또 신성한 은수자를 잠시동안 우리식구로 우리집에 두고 있다고 하는 우리들의 행복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그는 보는 바와 같이 조금 피로해 있으나 그의 시중을 어떻게 들어야 좋을지요…. 매괴참례에도 하급사단의 신품을 그에게 주는 행복을 맛보았는데 이것은 필경 우리생에의 최대의 행복일 것입니다.』
사뢰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오래전부터 샤르르 수사는 완전히 사제직의 준비가 다 되어 있었으므로 그에게는 모든 간격이 축소되었다.
즉 12월에 차부제 3월에 부제가 되어 1910년 6월 9일에는 <보네> 대주교의 임석하에 <몽떼이> 주교에 의하여 「비비에」에서 사제에 서품되었다. 주교가 샤르르 후꼬오 위에 두손을 놓았다. 이것으로 샤르르는 사제가 된 것이다.
이 1901년이라는 해에 샤르르 수사는 어느듯 42세였다. 그의 앞에는 새로운 인생이 열려졌다. 그는 <비비에> 주교교구의 사제였으나 교구 외에 사는 것은 자유였다.
이번에는 어디로 출발할 것인가. 이것은 그가 몇개월동안의 은둔생활 중 눈의 성모수도원의 독방 속에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문제의 하나였다. 물론 그에게는 전과 변하없이 포고지에서 나자렡의 생활을 한다고 하는 같은 목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일까. 우선 그는 또한번 성지에로 출발해 갈 것을 생각했다.
<말다>와 <마리아> <나자로>의 마을, 예수께서 항상 사랑으로 맞아주신 「베타니아」에 머물러 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경 그는 그곳에서 너무나 많은 위안을 넘쳐 흐르게 받지나 않을런지 이 일은 그가 이 계획을 버리는데 충분했다.
모록코가 그 광채의 모든 것을 가지고 소생하게 된 것은 이때이다. 모록코의 회교도들은 모르는 동안에 그를 천주에게로 끌어왔던 것이다. 그는 어느듯 하나에 대하여 백을 그들에게 돌려주고 인간으로 태어나신 천주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모록코인의 친구들의 뒤를 딸아가는데 몸을 바치는 이외에는 아무것도 원치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회교도들의 다리가 되기 위하여 순교의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내가 분배자가 된 저 거룩한 축연은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절뚝발과 이와 장님과 가난한 사람들 즉 신부를 가지지 못한 영혼에게 바쳐질 것입니다.
나는 청년시대에 알제리아와 모록코를 해메었읍니다. 인구가 1천만이나 되고 프랑스와 같은 크기를 가진 모록코에는 한사람의 신부도 없으며 프랑스보다도 7·8배나 옛날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 보다는 훨씬 인구가 많은 사하라에는 단지 신교사가 7,8인밖에 없읍니다. 나에게는 어떠한 민족도 이들 이상으로 버림받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읍니다.』라고 후에 말하였다.
샤르르, 드 후꼬오가 <말도세>를 동반하고 세리프의 제국(모록코)에로 출발한 것은 18년전이다. 그동안 모록코와 사하라에서는 허다한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1893년에는 젊은 군주 <아브드 엘 아지스>가 그의 아버지 <므레이 핫싼>의 뒤를 이었다. 나라 정세는 더욱 악화했다. 즉 더욱 심해가는 국내의 무정부상태과 권력과 통상에 의하여 승리를 거두고 하는 유우럽 대국간의 경쟁이 그것이다. 알제리아와 모록코 국경에는 전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대략 6만의 주민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오아시스가 남쪽 모록코와 접경하는 지대에서 알제리아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지방에는 아라비아계, 흑인계, 유대아계라는 사하라에서 가장 진기한 거주민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중세 말기에 훌륭한 도시를 여러개 건설하였으나 그것은 15세기 아라비아의 한 폭군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모록코로 가는 새로운 긴 여행을 준비하면서 샤르르 수사가 나자렡의 생활을 할 수가 있다고 한다면 최초에 항복했다고는 하나 중간지대와 대단히 가까운 이 지역 이상으로 더 좋은 곳이 있으랴.
동시에 작은 형제회를 창설하게 하는 그의 꿈도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천주에게 접근하기 위한 것이며 조금도 애덕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우리들은 모록코 국경에다 트라피스트수도원도 아니고 크고 여유있는 수도원도 아니고 개척농원도 아니나 검소하고 작은 은둔소 비슷한 것을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내가 원하고 있는 바가 완전히 이해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과 진리와 애덕과 예술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아인세후라와 그라라 사이에 기구와 사람들을 환대하기 위한 「자우이아」 를 세우는 것입니다.』
「자우이아」라는 말은 샤르르 수사가 북아프리카에 재출발하기 전에도 이미 표시하고 있던 아라비아 말이며, 이것은 그가 얼마나 왕년의 모록코여행의 추억에서 영감을 받고 있는가를 표시하는 것이다. 「자우이아」는 회교의 종교단체의 본거지다. 『형제들』이 같이 기구하기 위하여 집합하는 곳은 이곳이다.
그들이 순례자를 영접해들이고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에게 전과 다름없이 환대를 베푸는 것도 이곳이다. 회교도들이 모록코에서 때로는 생명의 위험에 직면하면서까지도 그에게 베푼 환대를 샤르르 수사가 상기하지 않을리가 있으랴.
아프리카의 대지는 다만 군인이나 상인이나 설교자로서 찾아오는 그리스도교들 밖에는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나자렡의 그리스도와 같은 생활을 하고 「그리스도의 유럽」이 비참하게도 망각하여 버린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한 환대』라는 계명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키는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는 오지 않는 것일까.
이 「자우이아」라는 말이 후꼬오에게 끼쳐준 모록코의 영향의 깊이를 강조하는데 충분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를 위대한 수도적 전통에서 분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반대로 그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다. 관상(觀想)은 손일(手工)의 적이 아닌 것과 같이 애덕의 적도 아닌 것이다. 그에게는 한가지 밖에 서두를 것이 없었다. 출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