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나자레노를 찾으나 부활하사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
<나포레옹>의 군대가 피비린내를 뿌리며 온 구주대륙을 행군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오스트리아」 주변의 한 작은 도시 「펠드커취」에 도달했을 때 상전에서 물건이나 주문하듯 살기 등등한 <릿를 코오프랄> 장군은 그 수하 장군에게 이 작은 마을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이 지령을 담당 수행할 사람은 <마시나> 장군이었다.
마침 부활날 촉촉히 이슬 젖은 아침햇살이 동트기 시작할 때 새벽미사에 참례하려는 주민들은 만팔천을 넘는 수많은 군졸의 그림자가 분지로 싸인 이 고을의 주위 언덕 위에 새까맣게 포위작전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갈팡질팡 시의회(市議會)를 열었다. 사자처럼 그들 위를 움크려 노리고 있는 대적군을 항전한다는 것이 무모한 짓이라는 의견에 모두가 합의했다. 기왕 포위되어 꼼짝달싹 못하게 된 바에야 불란서군 야영에 사자라도 보내어 그들의 자비를 간청해 보자는 제의도 있었다. 혼잡한 논의가 절정에 달했을 때 노련한 그 마을 본당신부가 일어섰다. 그의 논리는 간단했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군중을 잡아 이끄는 위력이 있었다.
『여러분은 오늘은 부활첨례입니다.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 예수께서 우리를 이 시름에서 구하실 것을 믿지 않으십니까? 어려움이 올 때 우리가 그 당장에 해야한다는 것이 천주를 잊고 그를 무시하는 것이어야 하겠읍니까? 물론 지금 우리는 무력합니다.
의기양양하고 힘찬 불란서군대를 대적해서 항전함은 무모한 짓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왜 성당에 가서 우리가 평소에 하든대로 부활을 축하하지 않습니까? 왜 전지하신 그에게 우리의 전부를 의탁하지 못합니까?』
군중은 말없이 해산하기를 서둘렀다. 동시에 마을에 있는 모든 종이 드높이 온 마을을 퍼져 나갔다. 종소리를 따라 거리로 물결처럼 쏙아져 나오는 기쁨과 신념의 얼굴들! 깨끗하고 화산한 옷차람! 침략해온 불란서군도 이 환희에 넘치는 종소리를 듣고 또 평소와 다름없이 유유히 교회로 서둘러 가는 사람들의 대열을 보았다.
확실히 이 마을에는 월등한 복병(伏兵)이 든든하게 배치되었거나 아니면 「오스트리아」의 대원군이 가까이 손잡고 있음에 들임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늠늠할 수 있을까? 불군 대장은 곧 퇴각을 명령했다.
오 참으로 감사한지고! 「펠드거취」의 부활의 종소리여! 이러한 「펠드거취」의 사실은 옛 애기만이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맞는 이 부활절, 크게 세계적으로 또 너와 나란 작은 세계를 막론하고 우리는 하나같이 범람하는 악과 유혈주의 절정을 앞둔 위협 앞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죽음의 재가 공기속에 섞여 우리의 호흡을 공갈한다. 무수한 유감들은 우리의 일손을 맥빠지게 하고 만사를 포기하고 회의에 뭍히게 한다. 『도대체 아글타글히 일해서 무슨 소용이냐 어차피 전쟁은 벌어지고 말 것이고 해아할 일은 힘에 겨웁고 도저히 이 살벌한 디렘마에서 빠져나가기는 글러먹은 일이니!』
돌이켜 생각하면 「펠드거취」의 사람들 역시 이같은 절망에 빠질 이유가 충분했다. 그들은 숨맥히도록 포위당했었고 적군은 중과부적의 상태고 주민들은 맨손으로 무력하기만 했다. 부ㄹ활첨례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고 싶었다. 죽을판에 부활첨례란 헛된 염불이요 가소롭고 의미없고 귀찮은 일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종이 울릴 때 이러한 나태와 무기력도 위험도 해결된 것이다. 꼭 이런 요행이 없어도 좋다. 난관에 부닥쳐 갈팡질팡 하지 않고 취할 태도를 분명히 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최선을 다할 가치를 자기 스스로 발견한다면 그것보다 값있는 것은 없다.
이제 우리도 노숙하신 신부의 말씀대로 위험이오 오건 곤란이 닥차건, 전쟁에 휩싸이건, 부활의 성종을 울려야 한다. 어떤 절망상태에 있더라도 우리주 예수의 부화량연엔 참가해야 하는 것이며, 설사 죽음의 경지에서라도 그의 제일(祭日), 승리의 향연을 마음 속에 기꺼이 맞아야 하는 것이니 그것은 부활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요, 생명이오, 참 삶이기 때문이다.
떠들썩한 모임과 화사한 옷차림과 채색 계란의 재롱과 다채로운 행사만이 부활예절이라면 이같은 강박관념과 번민의 세대에서 그 예절은 실상 번거러운 허례(虛禮)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도 수많은 이 땅의 사람들이 무엇때문에 이 아침 그토록 멀고 깊숙한 성종이 울리는지를 멋모르고 듣고 있는 첫이다. 이같은 신(神)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은 눈앞에 으르렁대는 몇만의 군병과 신무기보다 무섭게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다. 『신을 망각한 국가는 결코 오래 존속할 수는 없다.』 <워싱톤>의 말이 아니라도 전존(全尊)한 사랑의 배은(背恩)이 빚어낸 구약의 책벌이 역사적으로 그것을 증명해준다. 이 아침도 잠자리에 누운채 몽매한 무지에 졸리는 눈으로 성총을 소음으로 꺼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부활의 징정한 의미를 간추려 본다. 죽음과 죄악과 모욕과 질투를 이긴 예수께서 다시 나신 승리의 날이다. 가톨릭신아으이 주춧돌이 된 소생(蘇生)의 교리로써 우리 자신의 소생을을 기약해 주신 날이며 이 세상의 최상의 소망인 재생(再生)을 보증해준 날이다.
독재의 행폭을 겪고 이를 항거하던 학생들의 피가 우리에게 큼지막한 부활을 시도해주던 아쉬운 4월도 겪고 또한번 혁명도 겪고 우리들은 그래도 복잡하고 자살하는 동지를 눈앞에 보아야 한다. 이럴때일수록 우리는 「펠드거취」에서처럼 종을 크게 멀리 울려야 하는 것이다. 그 은은한 기쁨의 메아리가 모든 이의 심장에 울려퍼질 것이며 알아듣는 가슴에 말보다 힘차게 그 무엇인가 깨달음을 일깨울 것이다. 『알렐루야!』
李鍾淳 神父(筆者 서울 明洞大聖堂 主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