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85) 仁川畓洞(인천답동) (主敎座(주교좌))
작년 영세 무려 1575명
上陸戰이 남긴 탄흔 아직도 있어
대례미사는 주일마다
발행일1961-11-12 [제302호, 3면]
오랜 역사를 가진 하나의 큰 본당만이 아니라 이제는 한 교구의 중심이 되는 「카데드랄」(主敎座)이 된 답동(畓洞)성당은 인천에서는 어디서나 잘 보이는 그 좋은 위치에, 또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루네쌍스」 건축양식(建築樣式)으로 된 아름다운 우리나라 건축문화사(文化史)에 오를 문화재(文化財)의 하나이다.
피비린 순교의 역사에 종말(終末)을 고하게 한 1886년의 『한불수호조약』(韓佛修好條約)이 체결된 3년 후인 1889년 5월1일 「파리」외방전교회원 <요셉>(徐) 신부에 의하여 창설된 이 본당은 약 6년간 본 성당을 짓지 못하고 임시성당을 마련하여 사용하다가 1895년 성당을 신축하게 된 것을 그 후 제2대 본당신부로 부임한 <에우제니오>(全) 신부의 재임시에 증축(增築)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에 낙성(落成)된 것이 현재의 성당건물이다. 그러나 1950년 6·25 공산괴뢰군의 남침(南侵)으로 인해 그 해 9월16일에 개시된 UN군의 상륙작전(上陸作戰) 때에 이 아름다운 성당이 포탄(砲彈)을 맞아 제대 위 지붕이 뚫어지고 성체 난간에는 아직도 탄흔이 남아있어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추상(追想)케 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였던지라 그 당시 본당주임이었던 <바오로> 임(林鍾國) 신부님은 부득이 본당을 비우는 수밖에 없게 되어 6·25 후 3개월간 이 성당은 주인 없는 빈집이 된 때가 있었다. 전란(戰亂)의 종식과 함께 피눈물나는 노력이 계속되어 성당은 곧 원상회복(原狀回復)이 되어 현재에 이르렀는데 지금은 나날이 증가되는 신자들을 다 수용할 길이 없어 2층 성가대(聖歌隊) 좌석을 대폭으로 확장하여 성당 안의 약반이 2층으로 되어 있는 것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으로 성가대원(隊員)들만이 아니고 일반 신자들의 좌석부족을 보충해주고 있는 것 같다.
「메리놀회」에서 전교를 담당한 이후 본당 주임에 <죤.L.버어크>(張) 신부와 보좌에 <도날드.A.덴틴겔> (申) 신부님의 사목 아래 (지난 5월 말 현재의 통계로) 4천5백74명의 신자가 있는 바 영세자 많기로 이름 높은 이 본당은 지난 1년간 네 차례의 영세자가 1천5백7십명이나 된다.
주일에는 네 차례의 미사시간이 있는데 아침 6시와 8시30분(학생미사), 그리고 10시에(언제나) 대례미사가 있으며 저녁 7시에 또 미사와 성체 강복식이 거행되는데 미사 때에는 참례하는 모든 이가 다 「라띤어」 미사성가(그레고리안성가)를 합창하고 또한 「라띤어」로 주례신부와(천주경까지) 통경(通經)을 하는 합송(合誦) 미사를 드리고 있는 것이 또한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좋은 예전(禮典)운동이다.
본당에 속한 신자단체로는 큰 행사에 언제나 선봉역할을 잘하는 『성우회』(聖友會), 중·고등학교 재학생으로서 조직된 『학생회』 대학생과 남자 젊은이들로서 조직된 『청년회』 그리고 「보이스·카우드」 경기(京畿) 제15대의 역할을 하는 『대건(大建)소년단』 등이 있으며 평신자 사도직(使徒職)의 「레지오·마리에」 6개 「쁘레시디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