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祭館 窓门(사제관 창문)] 老年期(노년기)는 人生大成(인생대성)의 때
신앙 없는 인생관은 파멸
발행일1961-11-19 [제303호, 2면]
우리나라 풍속에 의하면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연령에 따르는 법이다. 나이 적은 이가 어른에게 대할 때는 특별한 애모와 존경을 드리고 따라 어른은 연소자들에게 어른다운 표양과 인격을 갖추도록 퍽 애를 쓰고 또한 의무로 느낀다. 이와 달라 서양엔 사회계급이나 인간 상호간의 지위를 연령으로서 크게 정해지지 않는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현재 무슨 일을 하는 분인가에 많이 달렸다.
연령이 사회계급을 구성하는 역할이 비록 동서양이 이와 같이 판이하지만 초성적 가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자에겐 나이 많이 먹을수록 본능적으로 인생의 마지막 때가 이르렀음을 느끼고 삶의 의욕이란 점점 줄어지는 법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아무리 나이 먹은 자가 연소자에게 세도를 부리고 존경을 그들한테서 받는다 하더래도 만일 그들의 인생관 세계관이 이 현세물질계에 국한되어 있다면 모든 것이 종막을 지우는 죽음 앞에는 하는 수 없이 비관과 두려움이 앞에 설 것이다. 흔히들 특히 부인네들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지금은 될 수 있으면 찌들어가는 이맛살 주름살이 보이는 얼굴을 손질하여 그것을 감추고 젊음을 보존하기에 노력하며 서로 얘기하는 중 남이 아직도 젊다하면 좋아하고 늙어가는구나 하면 속으로 섭섭한 감을 품고 그 얼굴표정이 달라지는 것 같다.
우리는 가끔 길에서 혹은 사랑방에서 흰수염 백발 할아버지들이 온종일 할 일 없이 장기만 두고 남의 얘기나 하고 공연히 젊은이들의 일거일동을 비웃거나 책하는 것을 본다. 할머니들은 줄곳 집안에서 할 것이 그리 없는지 며누리와 말다툼하고 못살게 구는 폐습이 많다. 이것은 대가족 제도를 주로하는 우리 한국에서 특히 많이 보이는 현상인가 싶다.
이런 폐단이 생명을 순 자연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은근히 우리 심리 속에 숨어 있는 죽음이란 무서운 것이고 그 죽음을 예고하는 노쇠기가 무의식 중에 짜증을 내게하고 장기나 남의 얘기로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덮어 버리려고 하는데서 이것이 한 국민의 생활양식화한 것 같다. 물론 개인 개인이 이런 심리적 과정을 느낀다는 것은 웃으울 일이다.
해가 가고 나이나 하나 둘 늘어가는 것을 할 수 없는 어떤 불쾌의 씨로만 보는 것은 순자연적인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같은 자연적 생의 관념을 좀 더 깊이 파고 추론해서 결론지운다면 나이가 많아지는 것은 단순히 공포증을 주는 것 뿐 아니라 도저히 머리에 두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견딜 수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현세 생명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늙어서 젊을때 누릴 수 있는 모든 낙을 이제는 사라진다는 마음에 어찌 나이 먹는 것을 아무리 전통이나 문화나 풍속으로 연장자에게 특증을 주느니 예모를 체리니 특별 존경을 드리니 한들 무슨 위로가 되며 낙이 될 수 있으랴! 도리어 이런 형식적 사회상징이 죽음의 두려움을 두고 느끼는 공포감 절망감만 더할 것이다.
자연적 생의 관념과 달리 초성적 개념은 나이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안전하고 즐거움을 준다. 이 초성적 생의 관념이란 현세지상생명은 앞으로 누릴 생명을 준비하는 전주곡으로 해석한다. 생을 보내는 동안 당하는 여러 가지 실패, 고통, 쓰라림, 근심은 장차 가질 수 있는 영원한 생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우리게 환기시키고 증명해 주는 한 가지 섭리적 현상이다. 이러한 신앙 위에서 생을 보내는 자들에게는 나이가 많아짐으로서 남이 누릴 수 없는 낙과 안도감을 느낄 것이고 또한 이것이 연장자에게 주어지는 형식적 상징으로만이 아니라 진실된 특권일 것이다.
이들 신앙가들은 육신이 쇠약해지고 기력이 줄어질지라도 언젠가 한 번은 영영 늙지 않는 청춘이 다시 있을 것을 확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마치 「갈바리아」산 십자가상에서 끝을 맺은 것 같은 육신이 다시 부활한 것과 같이 모든 인간은 재(灰)로 화한 육신이 언젠가 한 번은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 이것이 「그리스찬」의 죽음에 대한 근본적 가르침이다.
이런 신앙을 토대로 한 교리에 의해서 늙어서 할 일이 젊을 때에 하기 어렵거나 등한시한 것은 저 죽음에서 다시 일어날 영광의 부활을 준비할 수 있는 값진 때이다. 육신의 기력이 왕성함으로 일어나는 모든 세상의 유감을 쉽게 쳐 이길 수 있게 되는 것도 이 늙은 시절에서야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과거에 저지른 과오를 진심 통회하는 넉넉한 시간의 여유를 이때 가질 수도 있고 고요히 서적을 통한 혹은 묵상신공과 신심생활을 통한 신과의 가까이함을 도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얻은 삶을 이룩하며 겪은 모든 문제에 대한 실제 경험과 지식을 통해서 젊은이들을 돕고 선도할 입장에 설 수 있는 것도 늙어서 비로소 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싫어하는 청춘들에게 억지로 자기의 경험과 양심적인 처세술을 강권할 수야 없겠지만 뜻있는 젊은이들이 흔히는 연로자의 충고에서 받은 유익이 크다.
또 한 가지 노련기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생존경쟁이란 피할 수 없는 사회생활 중 한때라도 분심 없이 독서나 더구나 성상에 고요히 꿇어 신공바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생활과는 달리 쉽게 영신사정에 집중할 수 있고 세상의 삶이 요구하는 여러 가지 정신적 노력이 그리 묵인되질 않는다. 따라서 쉽게 정신집중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때이다. 물론 인간치고 누가 전적 정신집중이나 신공 중 분심없이 지낼 수야 있으리오 마는 지혜로운 노인들이라면 쉽게 그런 세상사물로서 좌우되질 않는다. 또 된다 치더라도 신공을 방해할 정도의 장난감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와같이 지혜롭게 늙어가는 것이란 여러 가지 아름다운 점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것을 결정지우는 것이다. 그러면 뜻있게 또한 지혜롭게 늙어간다는 것은 생을 초성적 신앙을 가져야 하고 또 이런 신앙을 통하여 비로소 나이를 가진다는 것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의 중대한 시기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은 인생관을 통한 늙어감이란 자기를 대하는 모든 젊은이로 하여금 더 착하고 더 행복하게 하며 나아가서 그들도 같은 모양으로 즐거움과 뜻있는 자기네들의 앞날의 늙음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