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30) 베니 아베스의 사랑의 집 ①
발행일1962-04-22 [제324호, 4면]
1901년 9월 6일 눈의 성모수도원을 출발하여 샤르르 수사는 또다시 「쌩보오므」를 지나 알제로 가는 배를 탔다.
부두에 내리자 그는 「스타우엘리」의 수도원장이 된 <동 앙리>와 백의성교회의 <게랑> 주교들의 영접을 받았다.
<게랑> 주교는 알제리아에 연결되늰 사하라 지역의 전가톨릭신자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깔다이야」의 호교구장으로 임명된 지 얼마되지 않았다. <샤르르> 수사도 교회와 행정부의 허가 없이는 사우라에 거처를 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곧 <게랑> 주교의 허가를 얻었다. 그는 정부당국으로부터 많은 곤란을 받았다. 사우라는 아직 실전지대였으며 민간인이 오는 것도 여간해서 승인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알제리아 총독의 정책은 신부가 오는 것에 대해서 반대했다. 오래전부터 총독부의 훈령은 어떠한 형식일지라도 회교도의 감정을 상할 염려가 있는 종교적 포교에 반대하라는 것이었다. 억지로 말하자면 다행하게도 샤르르 수사는 단지 혼자뿐이었다.
그의 수도자는 신비주의자의 하나의 꿈에 불과하였다. 그는 선전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은수자로서 살고 또 신부가 되어 있는 이상 가톨릭 교우를 즉 사우라에 있는 병사와 사관들에게 성사를 주는 일만을 계획하고 있었다. 나자렡에서 온 은수자의 이러한 계획은 본래 국가의 토대를 흔드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때 아직까지도 군대에 있어서 북아프리카에서 높은 지위에 출세한 여러 개인적인 옛날 친구들과 다시 만나지 못했더라면 사우라에 있는 여러 오아시스에 가고자 하는 샤르르 수사의 희망도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
옛친구중에는 그 해에 사하라의 오아시스지구 사령관에 임명된 동창생 <라페리느>와 종형제인 <까스도우리> 특히 「_시이_」 시대의 친구로서 알제리아 정부의 토민장관이 된 <라끄로와> 소령 등이 있었다.
결국 <라끄로와>가 모든 곤란을 해결해주었다. 그가 택한 오아시스는 「베니 아베스」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사우라에서 가장 큰 야자숲이었다.
거기에는 많은 토민들의 마을과 신부와는 전혀 거리가 먼 프랑스의 주둔군이 있었다. 이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남모록코에 가까운 숙영지였다.
1901년 10월 「베니 아베스」로 출발했을 때 샤르르 수사는 나자렡에 있었을 때와는 좀 다른 복장을 입고 있었다. 아프리카에 있기 때문에 그 지방의 토민풍의 의복을 입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것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그 지방 사람들과 그의 비참성과 우정을 서로 나누고 싶어서 그들과 복장까지도 같이 하려고 하였다.
그는 흰 간도우라(내의와 같은 작업복)와 같은 빛의 세슈(긴허리띠)를 띠고 있었다. 큰 묵주가 가죽띠에 달려있다. 그러나 그를 속일 수 없이 토민들과 구별할 수 있는 것은 간도우라위에 붙어있는 십자가가 꼬친 붉은 하트였다. 그는 토민들중에서 하나의 토민이 되려고 하였으나 그러나 애매한 것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항상 자기 몸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표지를 내걸고 있었던 것이다.
샤르르 수사는 기차로 남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철도는 이미 상당히 먼곳까지 가설되고 있었다.
종착역이 설치되어 있는 작은 마을에는 비극적으로 이 세상을 떠난 노탐험가를 기념하여 「두베리에」의 이름이 부쳐져 있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얼마나 여러가지 회상이 그의 친구의 마음을 조이게 하였을 것일까.
그후는 「베니 아베스」까지 눈에 안보이는 국경을 따라서 비스트(縱跡)를 가야했다.
은수자는 나자렡과 예루살렘, 시이에서 하듯이 걸인과 같이 걸어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였다 이 실전지대를 여행하는 것은 허가해주지 않았다. 떼를 지어다니는 모록코인의 강도에게 때때로 제지를 받고 있는 이 길을 호위 없이 왕래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샤르르 수사는 휴가를 마치고 군에 입대하는 <유오> 중위와 몇사람의 토인을 따라서 그들과 같이 <즈스화나> 강을 따라 말을 타고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사하라에서는 나자렡에 있을 때보다 훨씬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생활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달콤한 환영이었다. 소수의 프랑스인과 토민병의 소대 그리고 이 지방의 주민들이 살고있는 이 오아시스에서는 어떠한 나그네가 오더라도 눈에 안뜨일리가 없다. 더욱이 전례가 없는 신부가 온 것이다. 더욱이 심장있는 곳에먼곳에서도 보이는 그리싀도의 성심의 붉은 하아트를 부치고 있는 이 기묘한 은수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샤르르 수사는 경기병 아프리카 염기병 탐험가라고 하는 자기 과거를 조그만치도 이용하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다시 만난 <라페리이느>와 다른 동급생들은 그것을 여러사람에게 보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므로 사우라에서는 그를 꼭 만나서 경의를 표시하겠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어느 숙영지에서도 그를 경의와 공감을 가지고 영접하지 않는 곳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다깃드」에서는 그곳의 숙영지대장인 <드 슈스비엘> 중위가 아라비아기병 20명을 데리고 오아시스에서 30키로 떨어져 있는 곳까지 그를 만나러 찾아왔다.
나그네는 예수의 샤르르 수사라는 이름으로 자기 소개를 했으나 아무소용이 없었다. 프랑스인에게는 그는 즉시 샤르르 드 후꼬오 신부이었으며 아라비아인에게는 「마라부우트」(회교도의 은수자)이었다. 회교도 중에는 수많은 「마라부우트」 즉 그 생애를 신심에 바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지고자를 예배하지 않고 『개와 같이』 사는 그리스도교도에게도 역시 「마라부우트」가 있는 것일까.
갑자기 사막의 마른 언덕의 원형이 보이자 사우라강 황량한 모래사장 저편에 폭이 넓은 곡선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저편 언덕에는 7·8천주의 나무숲이 빽빽이 들어섰으며 야자나무 위에는 거대한 절벽의 봉오리가 보이고 있다. 거의 오아시스 전체가 개철과 바위로서 되어있었다. 소주둔군의 대장인 <레니요> 대위와 사관들에게 열광적으로 영접되어 <드 후꼬오> 신부는 은둔소가 결정될 때까지 감시소의 사무실에서 수일을 보냈다.
그곳에는 소박하고 번영한 새마을이 있었으며 「슈우트」인과 「하라데인」인이 살고 있었다. 대체로 천2백에서 5백의 주민이 있었으나 벨베에르인이나 흑인의 피를 받은 농부들이었다. 『주민은 대단히 얌전하다.』고 신부는 써놓았다.
『프랑스인들이 온 것을 매우 무서워하였으나 이곳 주민들은 그것에 매우 만족한 듯 태고 이래로 처음으로 전에 도이므니아인(약탈로 유명한 벨베에로족)에게 빼앗겼던 수확을 자기 손으로 해놓았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부는 사람이 사는 곳에서 완전히 멀리 떨어져 절대적인 고독 속에 도피하지 않는 동시에 그는 야자그늘에 사과원에 적막도 보호도 여러사람과 근저바여 사는 생활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약간 떨어져서 생활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있어서도 나자렡과 마찬가지로 그가 거처하는 장소는 다만 혼자 천주와 대면하는 참된 사막속에서 살기 위하여 마을에서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리 멀지 않게 조금만 떨저여 사는 것이다.
대단히 기묘하게 생각되는 이러한 생각은 저통의 선에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신부는 사막의 변두리와 오아시스 앞에서 관상과 자선과의 바로 중간에서 머물을 장소를 택했다. 이것은 수도생활에는 전례없는 새로운 맛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참말로 확실한 것일가. 중세의 대수도원은 절대로 사람들과 떨어져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환대를 받으며 주위에 그 수도생활과 농작의 영향을 빛나게 하면서 동시대의 생활에 널리 관여하고 있었다. 사막의 스승들까지 언제나 동굴속에 들어있지만 아니하고 그들의 원조를 먼곳에까지 전파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은 동리 사람에게 대한 사랑과 다른 것은 아니다.
「메니 아메스」는 알제리아 모록코의 경계에 있었다. 그는 프랑스인과 아라비아인과의 사이에 그리스도교도와 회교도 사이에 있었다. 고독과 신비 속에서 현존하는 천주와 그가 어떠한 사람이던 간에 이웃사람의 신비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와의 사이에서 신부는 어떠한 대립도 상상하지 않았다.
「베니아베스」에서 5백미터 지점은 불모의 타는 듯한 하마다(岩石高原) 속에 약간의 낮은 땅이 있었다. 그가 집을 새운 것은 하나밖에 없는 낮은 땅의 고개를 넘는 도중에 정적과 돌의 한가운데에 햇볕을 함빡 받는 곳에 세워졌다. 그곳에는 감시소의 총안도 오아시스의 야자숲도 보이지 않고 다만 모래언덕의 봉우리와 일망천리의 「하마다」와 「베니아베스」 방면의 하늘 위에 뚜렷이 솟은 고원에 가까운 지붕이 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