鬱陵宣敎(울릉선교)의 어제
20坪(평) 講堂(강당)서 조촐히 發足(발족)
自由黨(자유당) 抑制(억제)로 한때 萎縮(위축)
발행일1962-05-13 [제326호, 2면]
지금부터 육년전 그러니까 1956년도 겨울철이었다. 지금도 이 고장에서 전교에 힘쓰고 있는 현비오 회장과 이북출신 신도 두 분 도합 세명이 복음을 전하려고 이 섬으로 건너왔다. 그래서 지방인 몇몇과 의합 끝에 20평 남짓한 일반 가옥을 빌려 그해 성탄날 예비신자들을 모아놓고 감격깊은 그날을 축하하였다. 이것이 울릉천주교회가 발족한 첫걸음이다. 이어 기성회라는 것이 조직되었고 한달이 못가 예비자 수가 늘어 헤아릴 정도가 아니여서 주일첨례는 학교 도는 군청이 관리하던 넓은 건물들을 빌려서 쓰게 되었다. 현재 공소의 시초가 된 지방의 대표되는 분들이 도동과 연락을 가지고 지방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이전까지도 프로테스탄트신자들에 갖은 야유를 부리던 지방의 중견인물들 그리고 바깥 출입은 당초에 시키지 않던 얌전한 규수에 이르기까지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시급히 조직된 것이 지금은 돌아가신 베드루 홍(弼悦=日本音大出身) 선생 지도하의 성가대로서 이것은 지방 유능한 청소년들과 지식층의 젊은이들 부인들까지 불러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국내정세는 바로 자유당 전성기로 그들의 횡폭이 최고도로 달한 때였으나 당국의 교회에 가하는 압력이 시해지고 노골화 됨에 따라 교우 공무원의 수가 점차 줄어들고 이때 기성회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그러는 가운데 이듬해 이른봄 서대주교 각하로부터 이 지방 남녀 교형자매를 각별히 격려하시는 특별교서가 나리시고 노고 현(尙鉉) 총회장을 부임시켰다.
이 섬에 맨처음 들어오신 신부님은 현 효성여대학장 이나시오 전 신부님이시다.(1956년) 그때 신부님을 환영하느라고 굉장했지만 불행이도 신부님이 타신 배가 풍랑으로 도동에서 약 40리 떨어진 천부(天府)에 기항되어 영접도 못한 채 그곳 국민학교를 빌려 미사를 올렸다는 소식을 받았다. 생전 처음 신부를 보게 되는 주민들의 호기심에서인지 당시 미사에는 많은 군중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이듬해 5월중순에 방지거 신(尙道) 디모테오 김 두 신부님이 입도하여 맨처음으로 성세성사가 시행되었다.
이때 세 받은 사람이 무려 1천수백명에 달했다 한다. 1958년도에는 인보회를 주간하시던 윤을수 신부님이 구산후생학교 생도 몇을 파견시켜 놓고 다녀가셨고 남은 생도(여자)들은 구제양곡을 인수하여 문자 그대로 인보(隣保)사업에 이바지 할 예정이던 것이 몇달을 못있고 애석하게도 되돌아 가고 말았다.
그후에도 해마다 봄 가을에는 꼭 한번씩 신부님들이 다녀가셨고 신부님을 모시고 회장님들이 16개소나 되는 공소를 돌았으나 성사보는 분이 점차로 줄어드는 것이 현저하였다. 한해 기껏해야 한두번 교회지도자를 맞았으니 사실 신덕의 유지가 문제였었다. 그뿐 아니라 강당이 없어 셋방 아니면 해변에 모이곤 했다.
총회장게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어 영신 지도면에서는 그저 교회서적을 많이 읽고 어려움을 참아 견디라고 당부할 다음이었고 건물은 서주교님과 NCWC의 안 몬시뇰의 도움으로 간신히 움집 정도를 면한 공소 하나 하나를 지어나갔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사그러질 때가 있다.』 전 신부님이 여기서 신자들의 불꽃러첨 타오르던 처음 열성에 미리 경고하신 말슴 진정 그러한 시초의 열의에 따른 것은 무엇이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