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祭館 窓门(사제관 창문)] 연령에게 영적 애덕을
성찰해야 할 죽음의 준비
발행일1961-12-03 [제305호, 2면]
이 며칠은 어디를 가나 자연의 적막함을 느끼에 한다. 나무가지에서 맥풀리고 시들은 나무잎이 하나씩 둘씩 떨어지며 떨어진 가랑잎이 바람에 이리 저리 몰려 도랑물에 파묻친다. 그렇게도 더웁던 여름이 꼭 어제같이 여겨지건만 벌써 가을이 다 지나고 겨울이 다가온다. 자연을 파란 옷으로 꾸미던 나무잎들이 그렇게 떨어지는 것을 보니 성모당 옆뜰에 아직도 피어있는 몇송이 국화가 처량하게만 보인다. 한마디로 쓸쓸한 계절이다.
이 자연의 계절을 따서 11월이 연령에게 바친 달로 정해진 모양이다.
아직 버티고 있는 저 국화나 몇 포기 푸른 풀잎이 틀림없이 시들어 버릴 것이다. 생각할 줄 모르고 계절에 따라 끝을 맺는 저 꽃이나 풀잎과 꼭가팅 자연이란 울타리에 갇혀있는 우리도 끝을 맺는다. 틀림없이 시들어 빠진다. 그리고 도랑물에 빠져 썩는 나무잎과 같이 우리는 맥풀리고 기력이 끊어지면 땅속에서 썩는다. 다만 다른 것이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썩을 존재다. 끝을 보리라는 것을 생각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느 해우이와 마찬가지로 그 행위가 요구하는 어떤 목적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이 목적을 얻기 위한 당장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가는가?
죽음이 다달으면 모든 행동이 중지된다. 그때는 무엇을 애통하게 느낀다든가 좋은 시절을 다시 한 번 경험해 보고싶어해 보았댔지 아무 쓸데 없다. 죽음으로써 우리의 시험기간이 끝난다. 연필을 놓고 책상을 떠나야 하듯이 영혼을 떠나 육신은 땅밑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영혼은 시험의 답안을 기다려 판단을 받게 된다. 이러고 보면 중요한 것은 죽음을 맞기 전 그 준비기간이 가장 중대하다.
그러나 죽음 자체를 머리속에 두고서 이런 말이 되는 법이다. 공동묘지에로 향하는 행상이나 영구차가 가끔 우리 눈에 띈다. 그러나 그럴 때의 우리 심경이 정말 나도 저렇게 된다는 것을 잠재적 의식이 아니고 실감하는 때가 적은가 싶다. 흔히는 남의 일같이 느껴진다. 이상하게도 틀림없이 버리고 갈 세상과 물질이건만 우리 관심사는 정영 반대로 그 버릴 것에 더 애착심이 강하다.
실생활면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볼 때 대부분 죽는 사람이나 그의 친척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아주 큰 슬픔으로 생각한다. 영화에서도 죽는 행용을 하는 배우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면 잘한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이런 현상, 이 인생이 육신의 죽음으로써 다 끝난다는 무신앙가들에게는 마땅한 사실이다.
일년 중 한 달을 특별히 죽음과 그 죽음의 문을 우리보담 앞서 지난 분들의 혼을 묵상하며 지내는 신앙자에게는 이 모순된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삶을 영위하는지 성찰해야 할 줄 믿는다. 한 가지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준비할 것은 영적으로 장성되어야 한다. 이 죽음이란 벌의 마지막 단계를 감정의 균형을 잃지 않고 마중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이렇게 아직도 내가 힘써서 나의 죽음을 값진 것으로 만들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연옥의 영혼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흔히 죽은 이에 대한 애착이나 사랑을 우리는 물질로써 표현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 상징을 꽃으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모나 자기에게 가까운 죽은 이의 묘지 앞에 꽃다발을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죽은 이가 꽃의 향기를, 그의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 가지의 상징으로서 우리의 애착을 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망일이 되면 음식을 만들고 망자의 사진 앞에서 절하는 옛 풍속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징만으로서 우리의 애덕을 다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죽음을 넘어서는 아무 것도 없다는 자들에게는 이런 상징으로서 살아있는 자기 자신들을 위로삼을 수야 있겠지만 죽은 이가 정말 혜택을 얻어입는 무엇을 할 때 우리의 애덕 실천의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망자를 위해서 우리가 세우는 공로이다. 그리고 이 공을 이루는 방법 중에 기구로써 한다. 생생한 꽃송이는 결국엔 묘지 위에 시들어 버리지만 우리의 기구는 그 이들이 필요를 느끼는 동안 언제든지 생생하다. 말라 시들질 않는다. 우리가 바치는 이 영적 꽃다발인 기구는 연옥에서 티끌만한 죄벌을 다 씻어버리느라고 신음하는 영혼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는 것이다. 죽음은 죄의 벌이다. 그리고 마지막 고비인 만큼 이 현실이 쓰라리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 쓰라린 현실을 넘길 수 있느냐가 우리 인생의 가장 중대한 문제이다. 지금은 이 시험을 치루는 바로 시험장이다.
죽음을 당한 분들에게는 그들이 살 때 내가 했어야 할 애덕을 베풀지 못해 애석하게 느낀다면 지금 우리가 실천함으로써 훨씬 더 도움과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즉 기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