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漠(사막)의 불꽃] (32) 베니 아베스의 사랑의 집 ③
발행일1962-05-13 [제326호, 4면]
『내가 환대와 봉사에 쓸 돈이 없어서 곤란한 적은 드뭄니다. 성당을 위하여 돈의 곤란을 느낀 일은 전연 없읍니다. 성당을 유지하는데는 <봉디>의 종자매가 전면적으로 보급해 주었읍니다. 내가 부탁만 하면 마리는 즉시로 지불해주었읍니다. 「사랑의 집」의 지대(地帶)를 치러준 것은 마리입니다. 「훌라뷔니」의 종자매는 가난한 자를 위하여 매월 50프랑 여동생은 매월 20프랑(그 이상 받아들이는 것은 거절했읍니다)씩을 보내주었읍니다.』
매월 「베니 아베스」의 사관과 병사들도 40프랑에서 50프랑가지의 소액의 모금을 가난한 자를 위하여 보내오고 있었다. 이상이 그의 생활의 경제적 기초였다. 사하라에는 가난한 자가 많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것은 노예들이었다. 벌써 수세기동안을 유목민들은 흑인 매매를 하기 위하여 사막뿐이 아니라 「니제에르」와 「챠드」 지역까지 와서 약탈을 하였다.
「인간시장」에 재료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예대상이 몇번이나 「동부크루」에서 「마라켓치」로 지나갔다. 오아시스의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흑인농부 「하라틴」의 조상은 해방되거나 도망하거나 버림받은 노예의 자손이다. 탐험가와 반노예주의자 단체의 노력도 프랑스인들이 왔던 일까지도 이 시대에는 아직도 사하라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못했다. 약탈대의 조직이 불가능하게 된 안에 있어서는 아마도 대상들의 괴상한 모습을 보게될 이는 없겠지만 노예매매는 다소간은 은밀히 계속되고 있다.
드 후꼬오 신부도 「베니 아베스」에는 노예의 자식이 노예까 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최근에 「루우아」와 「수우당」에서 훔쳐가지고 온 5세로부터 15세까지의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우수한 문학자들이 장난삼아 노예제도에 찬사를 올리고 있는 이 시대에 샤르르 수사에게는 지중해 세계의 이쪽에 있는 노예들의 형상이 어떠한 것인지 확정할 수가 있었다.
그는 말한다.
『그들의 주인들은 필요한 일을 그들에게 강요하고는 그 다음은 음식도 주지 않고 입히지도 않고 집도 안빌려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여서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내버려 둔다. 노예들은 무엇하나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절대로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없다. 그들은 물질적으로도 극도로 비참하지만 정신적 비참은 더한층 크다. 거의 종교도 없고 그들은 증오와 절망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유목민 가운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우이아중에도 노예는 많이 있다.
그들의 중요한 일의 하나는 야자나무에 물을 주기 위하여 가죽주머니로 우물물을 푸는 것이다. (우물에는 때때로 디딤돌이 없고 활차도 전연없다) 이것은 대단히 피로한 노동이다. 만일 노력을 게을리하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다. 도망하려들면 주인들은 총을 쏘며 그들을 쫓아간다. 그리고 그들을 산채로 잡으면 발의 심줄을 끊어서 두번다시 달아나지 못하게 한다. 그당시 프랑스 당국은 아직도 침묵하고 있었다.
「사의우아」와 부족장 등 주요한 노예소유자인 그 지방의 두목들에게 반역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심의 사랑의 집 은수자는 그리스도교도이었으며 아무도 노예로 하지 않는다. 오아시스의 노예들이 단번에 그것을 알았다.
그들은 사랑의 집으로 모려들었다. 하루에 적어도 20명은 찾아온다. 신부는 언제든지 그들에게 빵과 우정과 그리고 아무데도 올데갈데 없는 사람이면 숙소까지도 주었다. 그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모두들 자기를 상환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 자신도 애긍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훨씬 이전에 자기의 전재산을 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친척에게서 받은 기부로 아이들과 젊은이를 몇명 상환했다.
5·6인 정도의 소수였다. 그들중 한사람은 약탈을 당한 유목민이어서 자기부족으로 돌아갔다. 다른 두 사람은 그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또 두 사람은 -두 사람 중 어린 아브드레쉬는 생후 3년6개월에서 상환되었다- 백의선교사들의 고아원에 가기로 됐다. 마리라는 흑인 노파도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은둔소에서 죽었다. 최후로 신부는 아직도 어린 포을앙베렉크도 상환했다. 포올은 은둔소에서 허드레일을 맡아보았다.
몇차례나 그는 자기 혼자 살기 위해서 신부를 떠나서 갔으나 다시 돌아와서 1916년 12월 1일의 비극의 날까지 신부에게 충성을 다바치고 있었다. 나이먹은 마리는 죽기전에 영세를 청했다. 샤르르 수사가 준 영세는 거의 이것뿐이었다. 그는 「베니 아베스」의 주임신부는 아니다.
민중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성소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사렡의 마을에서 침묵 속에 살으신 그 생활을 살기 위하여 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권한까지도 갖고 있지 않다. 있다고 하더라도 극히 미소하다. 그가 몇사람의 노예를 상환하자 즉시 오아시스에 소문에 퍼졌다. 다른 노예들이 은둔소에 찾아와서 자기들도 상환해달라고 탄원했다. 자기들을 압박하려는 것인가 자기들에게서 일꾼을 빼앗아버리려는 것인가 하고. 이번에는 사관들 편에서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은 이 지방의 두목과의 대립과 정부의 젼책을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사우라」에 사느나 것을 허락 받은 한 수도자가 소동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가 있을까 그때는 꽁브 내각의 시대였다. (교회를 박해한 내각) 샤르르 수사는 라뷔 쥬리도라스까세스도 아니다. 수년이래로 자취를 감추버리려고 운하고 있는 한 사람이 은수자에 지나지 않는다. 대체 그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군부에서는 그에게 할 수 있는대로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부탁했다. 처음부터 그는 몇사람의 노예를 상환한 것 이상으로 일을 더 진전시킬 만한 재력이 없었던 것이다. 만일 신부가 어떠한 방법으로 좀 더 효과적으로 활동을 한다면 「사우라」에서 이 「수도회원」을 내쫓는 것 보다 더 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는 그렇게 간단히 타인의 불행을 단념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직접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간접적으로는 어떠하였을까 그는 종형제인 드 까스트리와 게랑 주교에게 편지를 썼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온순한 은수자가 그들에게 분개한 항의를진술하고 있다.
『이 지방에는 노예까 필요한 것이다. 농경을 위하여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오아시스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부정확합니다 많은 오아시스 가장 번영하고 있는 오아시스에는 한사람도 혹은 거의 한 사람도 노예라고는 없읍니다.』 『이 치욕 이 부정에는 해방 이외의 약은 없읍니다. 어떠한 경제적 정치적 이유도 이와같은 부덕의(不德義), 이와같은 부정을 존속시켜 두는 것을 허락치 않습니다.』고 그는 썼다. 그는 쉴 새 없이 편지로 이 문제를 되풀이하며 취급하고 있다.
한번 주의를 환기시킴으로써 단념하지 않고 또다시 역설하기 시작한다. 절대로 해결을 지워놓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노예제도가 이곳에서는 애처러운 방법으로 계속되고 있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묵인하며 옹호해 줌으로써 경멸을 받고 있읍니다. -부정에 따르는 당연한 산물입니다… 고의로 부정에 가담하는 자 세상의 체면을 꺼려서 자기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자가 경멸을 당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들의 자칭 주인들에게 그들을 완력으로 누르거나 도망을 했을 때에 찾아내도록 하든지 보호와 정의를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프랑스 당국하에 피난해 오는 그들을 주인들에게 돌려 보냄으로써 그들에게서 무엇보다도 양보할 수 없는 보물(자유)을 도둑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꼬오의 생애를 통하여 그의 목소리가 이런 애조를 가진 때는 한번도 없었다. 요컨대 「베니 아베스」에 온 지 3년 후에 신부는 까스트리에게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장일치로 각 오아시스의 분견대장은 노예제 폐지를 위한 처치를 결정햇읍니다 노예매매는 절대로 금지되어 있읍니다. 만일 대우가 좋지 못하면 분견대장이 그들을 해방시킵니다. 이것은 커다란 진보입니다.』
서쪽의 고원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의 돌을 눈앞에 보면 그럴때마다 그는 자기의 바로 맞은 편에 있어서 지평선 저편에 보이지 않는 모록코 세계로 생각을 보내는 것이다.
「베니 아베스」에서 그는 벤 시문의 소식을 들었다. 때때로 남부의 모록코인들이 「베니 아베스」를 지나서 사랑의 집의 「은수자」를 만나러 온다. 샤르르 수사는 자기 편에서도 그들을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도 사랑의 집을 설립할 준비를 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방에로 짧은 여행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얼마전부터 모록코를 가끔 생각하고 있읍니다. 모록코 그곳에는 1천만의 주민들에게 한사람의 신부도 한개의 제단도 없읍니다. 그곳에서는 크리스마스 밤에 미사도 기구도 없이 지나고 있읍니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