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司祭館 窓门(사제관 창문)] 미움의 持續(지속)은 싸움의 持久(지구)
「반공」도 사랑으로
발행일1961-12-10 [제306호, 2면]
혁명이 이미 몇시간이 지난 6월16일 아침이었다. 길에서는 사람들이 전날과 같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서울에선 「구데타」가 일어났단다』 「구데타」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물론 그 설명을 듣고난 사람들의 표정이란 그냥 깜짝 놀라 어떻게 된 셈인지 모르고 당황했다는 것이 그 때 일반적인 태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공산주의만 아니면 괜찮겠는데』하는 말을 여러 입에서 들은 것이 나만해도 많았다. 혁명의 필요성을 느껴 그 혁명에 가담해서 어떤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것도 아니요 그와 반대로 혁명을 반대하여 싸우려고 나선 사람들도 없었다.
모이기만 하면 담화의 주제가 정치사가 대부분이고 정치에 가장 정신을 많이 쓴다고 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지만 일단 정치에 큰 변동이 있어 한 구성원으로서 저야 할 책임과 의무가 발생했을 때 거기에는 우도 아니요 좌도 아닌 아주 줄대 없고 비겁한 민족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나기도 한다.
다행히도 혁명정부에서 「반공」이란 원측이 이제 확실히 보장되고 집집마다 관공서마다 「반공」 「방첩」이란 「삐라」가 붙게되어 우리들의 공포심도 이젠 살아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무서워서 혹은 어떤 이유로 혁명대사에 우도 좌도 아닌 중간치기 노릇하던 이 민족이 반공이란 두 글자가 필요에 의하여 실천을 요구할 때 또한 땀과 피를 요구할 때 용감히 호응할가 대단히 의심스럽다.
가톨릭 신자가 반공전선에서 싸운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가톨릭적이라야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반공이란 문제에 들어있는 문제를 우리의 신앙의 빛으로 고찰해야 하고 교회에 적합한 무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는 한 이단이요 이것을 적대해서 쓰는 무기는 그리스도의 갑옷이다-사랑이다.
공산주의가 이단이란 사실의 근본 원인은 다른 이단과 아주 다른 특색을 갖고 있다는데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광적 열성이 악마의 힘센 영향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삐뚤게 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이단은 교회를 지적면에서 위협했으나 공산주의는 마음의 악화로서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악화란 것은 미움과 야욕,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 이 모두가 합쳐서 조직된 것이다. 그런데 일반 가톨릭 신자는 정치가나 외교가도 아니요 또한 정보원도 아니다. 그들은 다만 정치적으로 아주 미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강력한 영신적 힘을 갖고있다. 따라서 삐뚤어진 마음이 공산주의의 본질이라면 이것을 대항해서 싸우는 가톨릭은 영신적 힘이 되는 사랑의 마음으로서 싸워야 한다. 이 애덕이란 것은 그 근원을 지옥의 문이 처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애덕에서 온다.
애덕실천은 절대로 큰 상을 노리는 것이 아니며 영웅적 명성을 고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군중 속에서 인간 속에서 그들은 틀림없이 떠 가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 또한 애덕실천은 이루어저 가는 그리스도의 시닙체를 방해하고 그 모든 찌꺼기와 먼지를 찾아 꺼내어 치워버리는 것이다.
이와같은 애덕실천은 참을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큰 공사이다. 이 공사에는 어떤 규격지은 시간표나 지면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미움을 미움으로 대적해서 싸우는 전쟁은 아무리 어느 쪽이 옳든지 간에 그 싸움은 미움의 싸움밖엔 될 수 없다. 또 결과가 미움의 열매밖엔 될 수 었다. 공산주의가 인간의 마음을 미움으로 바꿔 전 인류를 이 미움이란 원측으로 투쟁해 나가는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그들의 무기가 이것밖엔 없다. 그들이 사회의 어떤 실천 목적을 두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꾸미기 위한 학적 체계는 그들의 것이 아니요 옛날의 철인들의 설이다. 다만 무죄한 어린이들과 우매하고 생활난에 시달리는 무리들 마음 속에 가진 수단을 다해서 미움의 씨를 뿌리는 것이다.
투쟁 마음의 투쟁 이것이 현세의 이단이며 공산주의다. 사랑을 원측으로 하는 가톨릭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가톨릭과 융합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가장 미워하는 가톨릭은 그들을 사랑으로 포옹하려고 한다. 또한 그것은 공산주의자일지라도 인간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왼뺨을 치면 오른뺨을 내 주라는 희랍인에게 어리석고 「유데아」인에게는 악한 표양이라는 가톨릭의 무기다. 이것이 돌 침을 받고 죽어 가면서 그들을 위해 기구한 <스데파노>의 사랑이다. 아니 그것은 자기의 무한한 사랑 대신 미움과 모독으로 십자가에 못박으려는 전 인류를 위해서 그들을 변호하면서 자기를 제물로 드린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이다.
「반공」이란 글자가 집집마다 붙어있고 우리 대부분이 공산주의를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러나 자칫하면 그들을 쳐이기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발명해 놓은 미움과 위협 그리고 공갈을 우리의 무기로 삼을 수가 있다. 만일 이렇게 되면 우리의 「반공」은 미움의 싸움 패배의 싸움으로 끝난다. 우리는 그들이 가지지 않는 우리만의 갖고 있는 무기로서 저들을 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서.